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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점프 업 - LA] 아픈 맘 치유·커뮤니티 봉사나선 '그 엄마에 그 딸'

'한인가정상담소' 母 수잔 정 박사 - 女 카니 정 소장

엄마는 의사다. 딸은 변호사다. 엄마는 37년차, 딸은 9년차다. 모녀는 ‘커리어우먼’이다.

엄마는 정신과 전문의다. 딸은 상담기관 책임자다. 모녀는 그렇게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유한다.

엄마는 비영리 단체 이사다. 딸은 그 비영리 단체 소장이다. 모녀는 그렇게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한다.

엄마는 수잔 정 박사(65), 딸은 카니 정 소장(33)이다. 모녀가 몸 담고 있는 단체는 한인가정상담소. 모녀는 그렇게 한 단체에서 한인 커뮤니티를 돌보고 있다.



#엄마 이야기
이민 온 후 정신없이 달려온 의사의 길
어느새 버팀목이 된 딸이 자랑스럽다


엄마는 1973년 뉴욕으로 이민왔다. 연세대학교를 나와 내과 레지던트를 마쳤을 때였다. 사실 정신과 전문의가 된 것은 내과 의사는 많은 반면 필요로 하는 환자는 많은데 비해 정신과 의사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일반 정신과 과정 4년에 소아 및 청소년 과정 2년을 더 공부하고 정신없이 커리어를 쌓고 돌아보니 한인들의 정신과 치료에 대한 인식은 너무도 부정적이었다. 정신질환하면 정신분열증을 떠올렸다. 정신과하면 ‘미친 사람’이 가서 치료받는 병원이라 생각했다. 못 배운 사람, 많이 배운 사람, 가난한 사람, 부자인 사람에 상관없이 그랬다. 치료를 받고 싶어도, 치료가 필요해도 꼭꼭 숨겼다. 그래서 한인 커뮤니티에 나와 정신질환에 대해 알리고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81년 LA에 와 처음 뛰어든 봉사는 KYC(지금의 KYCC). 한 교회 다락방에서 모여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상담사들을 지도했다. 환경은 열악하고 한인들은 정신질환에 대해 무지했다. 90년 초반부터는 가정상담소에서 상담사들을 교육하고 지원했다. 상담기관의 상황도 열악했지만 상담을 받기 위해 찾는 한인들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이들은 치료가 필요한 데도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체류신분 문제 때문에 병을 키우다 곪을 대로 곪은 채로 상담소를 찾았다. 하지만 2000년초 가정상담소를 떠났다. 그래도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학교, 교회, 단체 등의 세미나와 워크샵을 찾아가 집중력 결핍증, 우울증, 조울증에 대해 설명했다. 정신질환은 미친 것이 아니라, 천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두뇌 작용의 균형이 깨져 생기는 것이라고,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렸다.

엄마는 카이저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이면서 USC 의과대학 조교수다. 한달에 두번 가정상담소에 나가 상담사들을 지도한다. 여전히 세미나와 포럼 등에서 강의한다.

지금 엄마는 혼자가 아니다. 딸과 함께 봉사한다. 딸과 지식을, 경험을 나눈다. 엄마는 딸 덕분에 커뮤니티에,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노출된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딸과 함께 하기 때문에 든든하다. 딸은 이제 엄마가 버티고, 견디어 내는 힘이다. 엄마는 딸이 자랑스럽다.

엄마는 일과 가정 모두 조화롭게 해내는 딸이 대견스럽다. 딸이 지금까지 이상적으로 잘 해왔지만 인생은 참 쉽지가 않다. 엄마는 내 어머니가 해준 것처럼 딸에게 일과 가정, 커리어와 봉사 모두 잘 할 수 있도록 끌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딸 이야기
행동으로 보여준 엄마 '흔적' 닮고싶어
사회 약자위해 법적 조언·상담 나섰다


딸은 일과 가정, 커리어와 봉사 모두 열심인 엄마를 보며 자랐다. 딸이 자라면서 본 엄마는 바빴다. 하지만 속상하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엄마는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릴러오고, 학교 일이 있으면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주말에 가족과 함께 했다. 무엇보다 엄마가 하는 일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었다. 딸에게 봉사는 당연한 일이 됐다.

딸은 엄마가 한번도 ‘노(No)’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세미나에 와달라고 하면 엄마는 항상 달려갔다. 그렇다고 엄마처럼 돼야겠다, 엄마처럼 해야겠다 생각해본 적은 없다. 자연스럽게 눈이, 마음이 한인 커뮤니티 봉사에 쏠렸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 생각을 하거나, 해야겠다 마음을 먹지도 않았다. 그냥 봉사가 자연스러웠다.

딸은 2002년 변호사가 됐다. 하지만 잘 나가는 로펌 대신 첫 직장으로 시민권리를 위한 비영리 단체를 택했다. 그 어떤 과정에서, 그 어떤 결정에서 의식적인 것은 없었다. 엄마는 딸의 결정을 지지하고 딸이 잘 할 수 있도록 격려, 조언했다. 딸은 사회의 약자를 위해 법적 조언과 상담, 법적 절차를 진행했다. 가정상담소 소장으로 일하기 전에는 세입자 권리 및 보호를 위한 비영리 단체에서 일했다. 하지만 주택권리센터(HRC)가 LA한인타운에 있는데도 한인들은 문제가 있는데도,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도 한인 단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찾질 않았다.

한인,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하고 싶어졌다. 변호사이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하고 상대방과 싸우는 일도 그만두고 싶어졌다. 한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해졌다. 봉사도 좋지만 기왕이면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한인 단체에 들어가 한인들과 직접 부딪히며 도움을 주고 싶어졌다. 마침 가정상담소가 소장을 찾고 있었다. 2009년 3월 일이다.

딸은 엄마처럼 정신과 치료를 하거나 상담을 하는 것은 아니다. 상담소의 행정적, 재정적 관리를 맡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한다. 딸은 각종 세미나를 기획한다. 그리고 엄마를 ‘이용’한다. 딸이 준비한 세미나의 강사는 엄마다. 엄마는 ‘공짜’로 나와 정신질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깨워준다.

딸에게 엄마는 ‘개척자’다. 엄마는 봉사를 말 뿐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줬다. 엄마는 딸에게 커리어의 길을, 봉사의 길을, 삶의 길을 몸소 보여줬다. 딸은 엄마가 터놓은 길에 새겨진 발자국을 따라간다. 딸은 엄마의 흔적을 닮고 싶다.

#모녀 이야기
엄마 '봉사' 보고 성장한 딸 이젠 동료
밀어주고 당겨주며 '헌신' 할 곳 찾는다


이제 모녀는 함께다. 흔히 가정상담소 이사인 엄마가 딸이 소장으로 일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다. 딸이 먼저 소장이 됐고 엄마를 이사로 끌어들였다. 엄마는 7~8년 만에 다시 상담소 이사로 들어왔다.

전에 엄마는 혼자 찾아 다녔다. 이제는 딸이 차려놓은 밥상 앞에 앉는다. 모녀는 그렇게 서로를 밀어주고 당겨주는데 재미를 부쳤다.

이재희 기자 jaeheele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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