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마다 '습관성 방출설' 겪는 박지성의 위기 탈출 노하우
기회 안 줘도 실전 준비, 쇼트트랙 전략 통했다
현장 투입되면 야수처럼 달려 골 사냥…퍼기 타임 때 득점으로 화끈한 인상
지난 달 7일 영국 맨체스터에 위치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홈구장 올드 트래퍼드.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울버햄프턴을 홈으로 불러 들이고도 종료 직전까지 무승부 분위기(1-1)로 흐르자 7만5000여 맨유 팬들은 약속이나 한 듯 '호날두'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팬들은 7년간 맨유에서 마술같은 골로 수많은 승리를 선물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5.레알 마드리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박지성(29.맨유)이 오른 측면에서 돌파를 시작했다. 수비수 세 명을 차례로 제치더니 페널티 지역 오른쪽에서 왼발 터닝슛으로 골을 뽑았다. 맨유의 극적인 2-1 승리였다. 전반 종료 직전 선제골까지 뽑았던 박지성의 박지성에 의한 박지성을 위한 모노 드라마였다.
박지성은 상승세를 이어가 올 시즌 5골.4어시스트를 기록 중이다. 그는 올 시즌 초반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위기론을 언제나처럼 이겨냈다. '습관성 위기'를 이겨내는 평범하지만 쉽지 않은 박지성만의 위기 탈출법은 무엇일까.
울버햄프턴전서 2골 방출설 일축
박지성은 매 시즌 초반이면 항상 위기에서 허우적댄다. 경쟁자가 출현하기도 하고 수술대에 오를 때도 있었고 갖가지 외부 변수에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그때마다 이적설이 터져 나오곤 한다.
올 시즌도 마찬가지였다. 초반 9경기에는 교체로만 3경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로 컵 대회에 출전할 뿐이었다. 루니가 이적한다는 얘기가 나돌 때는 토트넘의 가레스 베일을 사오기 위해 맞트레이드된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9월23일 스컨소프와의 칼링컵 경기(5-2승)에서 맨유 입단 후 한 경기 최다 공격포인트(1골.2어시스트)를 올렸지만 2부리그 하위팀이라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설상가상 두 차례 수술받았던 오른쪽 무릎 통증이 재발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10월27일 울버햄프턴과 칼링컵 경기(3-2승)에서 1골을 터트리며 건재를 알렸다.
3일 부르사스포르(터키)와 UEFA챔피언스리그 원정(3-0승)에서 어시스트를 올린 데 이어 울버햄프턴전에서 기록한 2골은 전환점이 됐다. 특히 잔여 시간에 터져나온 결승골은 훈장과도 같았다. 맨유 팬들은 잔여 시간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이름을 따서 '퍼기 타임(Fergie Time)'으로 부른다. 맨유가 유독 잔여 시간에 강했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브루스-솔샤르-오셔-오언 등 역대 퍼기 타임 때 골을 넣었던 영웅들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동료 부상으로 생긴 기회 절대 안 놓쳐
K-리그에서 뛰는 한 후보 선수에게서 푸념을 들은 적이 있다. "감독님이 준비하라고 하면 정신 바짝 차리고 몸을 만들죠. 한데 일주일이 지나도 보름이 지나도 기회를 주지 않으면 긴장이 풀려요. '이번에도 안 되나 보다' 하고 체념하면 그제야 기회가 오더라고요. 제대로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또 벤치를 지켜야하니 답답한 노릇입니다"라는 하소연이었다. 막상 준비했을 때 기회를 주지 않는 감독에 불만을 표하는 선수의 심정에는 공감이 간다. 일반적인 선수들이 경기를 뛰지 않고도 집중력과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는 약 2주일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지성 앞에서는 변명에 불과하다. 그는 마치 트랙의 안쪽을 돌며 자기 순서를 기다리다 기회가 오면 곧바로 풀스피드를 내는 쇼트트랙 선수들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보통선수라면 제풀에 쓰러졌겠지만 그는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엔진'을 풀가동시킬 수 있도록 준비한다. 오른 무릎 수술을 받고 270일 만에 복귀했던 2007년 12월 선덜랜드 원정에서도 그는 공백이 무색할 만큼 최상의 경기력을 내보이며 감독의 신뢰를 되찾았다.
그는 "왜 골을 못 넣느냐는 비판에는 수십 가지 이유를 들어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왜 꾸준하지 못하느냐는 비판은 아프고 치명적"이라며 "일상의 치열함만이 성공으로 이끌어줄 유일한 답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했다. 박지성은 위기 때마다 반전해온 자신을 행운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행운과 우연의 차이는 분명히 갈렸다. 그는 위기의 터널을 벗어날 때마다 "사소한 것 쉽게 놓칠 수 있는 주변의 것들을 소중히 챙기다보면 항상 더 큰 선물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고 말해왔다.
일본 J-리그 교토에 입단했던 2000년 독일 출신의 게르트 엥겔스 교토 감독이 개인 훈련을 너무 많이 하는 박지성을 말렸다고 한다. 어떤 외부 자극에도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해내는 고 지식한 DNA는 위기의 순간마다 그를 지탱해준 힘이다. 그는 "돌이켜보면 그런 고지식함 때문에 내가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2003년 PSV 에인트호번에서 뛸 때 홈 팬들은 '아시아로 돌아가라'는 야유를 이겨내며 그의 DNA는 더 단단해졌다. 그 DNA는 꾸준히 진화해왔다. 최전방에서 끈질긴 압박으로 상대 공격 속도를 늦추고 좌우 풀백의 공격활로를 열어준다고 해서 그는 수비형 윙어(defensive winger)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호날두가 이적한 지난 시즌에는 '수비형 윙어 무용론'에 휘말리며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엔진에 '수비형 윙어'와 함께 '센트럴 파크(Central Park)'를 새롭게 장착하며 위기를 뚫었다. '센트럴 파크'는 중앙 미드필더로 나서 맹활약을 펼친 그에게 영국 언론이 뉴욕의 공원 이름을 따서 붙인 별명이다.
박지성이 가장 따라 배우고 싶던 멘토는 올레 군나르 솔샤르다. 그는 노르웨이 출신으로 13년간 맨유에서 126골(366경기)을 터트린 최고의 공격수다. 2007년 은퇴한 후 맨유 유소년을 가르치다 최근 노르웨이 몰데 감독에 올랐다. 한때 퍼거슨 감독이 팀에서 내보내려 했을 때 솔샤르는 "교체 멤버라도 좋다. 연봉을 깎아도 좋다"면서 맨유에 남았다. 이후 그는 주전 스트라이커가 아닌 후반 조커로 뛰었다. 1999년 5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종료 1분을 남기고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골을 터트리며 맨유의 전설에 올랐다. 박지성은 입지가 좁아지고 이적설에 휘말릴 때면 솔샤르를 떠올린다. 그는 "솔샤르는 나와 키도 비슷하고 체격도 크지 않다. 나보다 빠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쩌면 그렇게 골을 잘 넣을 수 있었을까"라며 "맨유 팬들은 경기에 지고 있을 때도 '괜찮아. 우리에게는 솔샤르가 있잖아'라고 외쳤다. 나도 그런 신뢰를 얻고 싶다"고 말했다. 박지성은 오른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하던 2007년 가을 솔샤르가 자청해서 그의 훈련을 돕기도 했다. 솔샤르 역시 같은 수술을 받고 2년이 넘는 재활을 겪었다.
울버햄프턴과의 경기에서 잔여시간에 터트린 박지성의 골은 출전 시간이 적더라도 승리를 부르는 골을 터트렸던 솔샤르를 생각나게 한다. 박지성은 어느 때보다도 빨리 위기론에서 벗어나 본 궤도에 올랐다. 그는 부상없이 한 시즌 10골 이상의 골과 맨유의 우승을 노리고 있다.
최원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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