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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의 와인 이야기] 정열적인 탱고와 축구…천혜의 고원지대

와인 양조의 파라다이스,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가다
와인은 삶의 동반자요 행복 이끌어 내는 도구

제3편 - 고도의 숨결, 아르헨티나 멘도사의 와인들

오랜 종주국이었던 스페인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프랑스의 예술을 동경하고 영국인의 실용성을 닮고 싶어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염두에 둔 말이다. 또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대규모로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지금은 아르헨티나 곳곳에서 이탈리아의 흔적이 발견된다. 작별인사도 스페인말 ‘아디오스’ 대신 이탈리아말 ‘챠오’를 더 많이 사용한다.

안데스 산맥을 경계로 두고 있는 칠레의 산티아고와 멘도사 사이를 오가는 데엔 불필요한 검역도 없고 통관 절차도 수월한 편이다. 가방에 몇 병의 와인을 들고 비행기를 타도 문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와인시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많이 다르다. 칠레가 수출에 주력하는 반면 아르헨티나는 내수시장이 강세다. 생산되는 와인의 대부분이 자국인들에 의해 소비되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와인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와인시장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세계 5위의 와인 생산국이며 6위의 소비국인 아르헨티나가 세계 수출 시장에 기지개를 켜며 눈을 돌리고 있다. 탱고처럼 정열적으로 마라도나의 드리블처럼 거침없이 말이다.

천혜의 고원지대, 멘도사(Mendoza)

산티아고에서 멘도사로 넘어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 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이륙한 지 30분 정도 지나 안데스 산맥을 넘을 즈음 터뷸런스(Turbulence-갑작스런 기류변화로 비행기가 흔들리는 현상)가 일어났다. 10분 동안이나 난기류에 흔들리는 비행기 안의 장면을 상상해 보라.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바로 내 뒤에 앉아 있는 여인은 아예 목을 놓아 울었다. 그 숨막히는 공포가 끝날 무렵 비행기 창으로 아콘카과(Aconcagua)의 기골 장대한 산맥들이 눈에 들어왔다. 히말라야, 킬리만자로와 같이 세계 7대 높은 봉우리로 유명한 아콘카과의 정상은 해발 6962m에 달한다. 발 아래 펼쳐진 웅장한 산맥과 만년설 그리고 쪽빛의 호수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아르헨티나 와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와인산지, 멘도사는 하늘과 맞닿은 고원지대다. 대부분의 포도원들은 해발 800~1500m의 고도에 위치한다. 병풍처럼 멘도사를 두르고 있는 안데스 산의 만년설은 달력사진에 어울릴 만한 수려한 배경인 동시에 포도원의 관개용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이 부족한 저습지대의 멘도사에 눈이 녹아내린 물은 자연의 기운을 담은 생명수처럼 포도열매를 키워낸다. 천혜라고 하는 것은 고원지대에 쏟아지는 태양과 고마운 수자원인 만년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고혈압이나 심장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와인에 주목할 이유가 있다. 고지대 와인이 심장병에 탁월하다는 런던 윌리엄 하비 연구보고서가 그 근거다. “해발 800~1500m에서 일조량을 충분히 받는 포도 열매들은 껍질이 검게 그을리고 두꺼워져서 다른 어떤 지역의 열매보다 훨씬 강한 폴리페놀을 포함하게 된다.”

아르헨티나 와인의 대명사, 말벡(Malbec)

서두에서 얘기했듯 아르헨티나에는 이탈리아 이민자가 많다. 멘도사가 대표적인 도시다. 그들은 고급 와인보다는 식사와 함께 할 적절한 와인이 필요했다. 또한 질보다는 벌크 와인처럼 가격이 저렴한 와인들을 선호했다. 그러다 보니 잡다한 포도종을 섞어 만든 와인이 많았고 대부분의 와인이 수출용이 아닌 내수용으로 소비됐다. 그런 아르헨티나 와인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이 바로 말벡 품종이다. 말벡은 원래 프랑스 남부의 카오르(Cahors)지방에서 나는 종이었으나 그곳에서는 이렇다 할 특징을 드러내지 못했다. 영국의 와인평론가 잰시스 로빈슨은 “남프랑스에서 유입된 말벡이 남미에서 더욱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극찬했다. 1852년경 프랑스 보르도에서 유입된 말벡 품종에 심혈을 기울이면 세계적인 수준의 와인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 몇몇 아르헨티나 와인주자들에 힘입어 말벡은 새 생명을 얻었다. 국제적인 경험과 시장의 원리를 빠르게 깨달은 Nicolas Catena(Catena Zapata포도원의 오너)같은 선각자가 없었다면 말벡은 아직도 빛을 보지 못했을 수 있다. 안데스의 정기를 받은 기골 장대한 구조, 부드럽고 풍부한 타닌, 잘 익은 과일 향, 야생 허브와 향신료 향, 숙성될수록 우아해지는 피니쉬가 특징인 말벡은 이제 아르헨티나 와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전통과 혁신의 이중주, 멘도사의 포도원들

“잠자던 거인이 깨어났다”고 와인스펙테이터 기자 James Molesworth의 말대로 최근 아르헨티나는 세계 와인시장에서 가장 주목 받는 와인생산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나파밸리에 로버트 몬다비가 있고, 피에몬테에 안젤로 가야가 있다면 아르헨티나에는 니콜라스 카테나가 있다”고 할 정도로 니콜라스는 ‘말벡의 파이오니아’로 통한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아르헨티나 와인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월드 클래스의 와인을 멘도사에서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 그는 다년간의 연구와 조사,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는 신념을 바탕으로 말벡의 질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그의 노력의 결과는 카테나 사파타(Catena Zapata) 포도원에 응집돼 있다.

새벽 어스름을 가르며 카테나 사파타 방문길에 올랐다. 포도원에 도착하니 동이 터 왔다. 안데스 산 자락의 여명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마야 문명을 연상케 하는 카테나 사파타의 양조장 꼭대기 위로 태양이 솟아오르며 포도밭을 비칠 때는 마치 천지창조의 한 장면처럼 장엄했다. 지하 셀러는 매우 현대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고 올드 빈티지의 와인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루티니(Rutini) 포도원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원 중 하나다. 1885년에 이탈리아로부터 건너온 루티니 일가에 의해 조성된 이 포도원은 19세기에 지은 양조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정원에 딸린 와인박물관에는 4500점에 달하는 옛 포도 농기구들이 진열돼 있어 방문객들의 흥미를 더해준다. 연간 6만6000명의 방문객이 이 예스러운 박물관을 찾는다. 루티니의 철학은 멘도사의 전통을 최대한 보존하여 전수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식재료도 포도원 주변의 농가와 축사에서 얻는다. 신선한 야채 샐러드와 숯불에 막 구워 내온 각종 육류로 마련된 오찬은 매우 정겨웠고 마치 가까운 친척집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1996년 칠레의 콘차이 토로와 기술제휴하여 우수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트리벤토(Trivento) 포도원도 주목할 하다. 역사는 짧지만 자동 온도조절 시스템 같은 첨단 양조시설을 갖추었고 전통보다는 실험정신과 역동성에 중점을 두고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보석과 악세서리 회사인 스왈로브스키가 소유하고 있는 노르통(Norton) 포도원의 와인들도 주목 받고 있다. 이곳은 산지별, 등급별로 체계를 두어 스파클링 와인을 비롯해 화이트, 레드 와인을 골고루 생산한다. 노르통 와인을 마시는 것은 곧 아르헨티나의 보석을 만나는 길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제 아르헨티나의 특징을 고루 갖춘 말벡 베이스의 와인들을 즐길 차례다.

<추천 와인 & tasting notes>

-카테나 사바타, 말벡 아르젠티노 2006 (Catena Zapata Malbec Argentino) $90~100


보랏빛이 감도는 짙은 적색. 검은 후추, 블랙베리, 삼나무 향, 신선한 산도, 입안을 가득 메우는 복합적인 부케, 부드럽고 달콤한 타닌, 긴 여운. 오래 숙성이 가능한 고급와인

-니콜라스 카테나 사바타 2006 (Nicolas Catena Zapata) $90~100

보랏빛이 감도는 깊고 짙은 적벽돌색, 잘익은 자두, 블랙베리, 토스트와 토바코 향,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타닌, 견고하고 힘찬 구조, 전체 밸런스 우수함, 긴 여운.

-루티니, 트럼페테 리저브 말벡 2008 (Rutini, Trumpeter Reserve Malbec) $19

짙고 깊은 적색. 체리, 자두, 민트, 스모크 향, 강하면서 달콤한 타닌, 바닐라 맛. 풀바디. 중간 정도의 여운

-루티니, 카베르네 소비뇽-말벡 2008 (Rutini, Cabernet Sauvignon-Malbec) $25

짙은 적벽돌색, 체리, 딸기, 검은 후추, 토바코와 시나몬 향, 달콤한 타닌, 강건하고 견고한 구조, 감미로운 뒷맛과 비교적 긴 여운

-트리벤토, 리저브 말벡 2007 (Trivento, Reserve Malbec) $11.

밝은 루비색, 바닐라, 체리 향, 둥글고 부드러운 타닌, 신선한 산도, 거칠지 않은 미디엄 바디, 균형감이 돋보임

-노르통, 퍼드리엘 싱글 빈야즈 2005 (Norton, Perdriel Single Vineyards) $50

60%의 말벡, 28% 카베르네 소비뇽, 12% 메를로 블랜딩 와인. 깊고 짙은 적색, 농축된 붉은 과일 향, 풍부한 질감과 탄력 있는 구조, 강건한 타닌, 매우 신선한 산도, 제비꽃과 삼나무 향, 균형 잡힌 긴 여운.

이 밖에 프랑스 슈발블랑과 아르헨티나 테라자스의 합작품인 슈발데잔데스(Cheval des Andes), 알타비스타(Alta Vista), 트라피체(Traoiche) 포도원의 와인들도 추천 대상이다.

아르헨티나를 방문하는 동안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은 삶의 여유와 가치였다. 한 때 세계 4위의 부자나라였던 아르헨티나는 추억 속에만 존재한다. 금융위기로 경제적인 어려움은 일상이 돼버렸고 탈출구 찾기는 아직도 요원하다. 그런데도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여유가 넘치고 문화적인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 휴일이면 메케한 자동차 매연으로 가득 찬 거리에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넘쳐난다. 쉽지 않은 삶을 대변하듯 남루한 옷차림이지만 표정만은 밝고 따뜻하다. ‘아사도’라 불리는 바비큐를 즐기고, 철제그릴 파리야에 염소고기 치비토를 구워 먹으며 마냥 행복해 하고, 소박한 레스토랑과 카페에서 밤 늦게까지 이야기 꽂을 피우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겐 가난의 고단함 보다는 행복과 소통의 기쁨이 엿보인다.

제러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 를 통해 “인류가 지구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공동체의 행복과 공감이 중요하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빈곤해도 삶의 질적인 면에서 행복을 누리는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와인이 아닌가 싶다.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주 오래 전부터 와인을 동반한 아르헨티나 사람들. 그들에게 와인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다. 와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 인간의 노동과 자연의 섭리를 어렵게 거론하지 않아도 그들은 와인이 삶의 동반자며 공동체의 행복을 이끌어내는 공감의 도구라는 것을 매우 일찍 깨달았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방문을 도와준 측에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합니다.

와인에 관심 있고 전문적인 교육과 와인 네트워킹을 원하는 분들을 위한 TIP
Society of Wine Educators: 1977년 캘리포니아의 Davis를 필두로 매년 미국의 도시를 순회하며 와인컨퍼런스를 여는 와인전문가 및 와인애호가 소셜 네트워킹. 와인교육가를 배출 하는 두 가지 프로그램으로 Certified Wine Educator(CWE)와 Certified Specialist of Wine(CSW)이 있다. 지난 2010년 7월 28~30일, 사흘 동안 워싱턴 DC에서 34회 컨퍼런스가 열린 바 있고 내년 2011년엔 Rhode Island의 Providence에서 35회가 예정 돼 있다.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다양한 와인시음, 저명한 와인 피플과의 조우, 와인파티, 와인 교육 세미나다. 전문가 수준이 아니더라도 선택하여 참여할 수 있다.

자세한 정보는 www.societyofwineeducators.org Tel 202 408 8777

글·사진=워싱턴 중앙일보 와인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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