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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의 와인 이야기] 역경 딛고 '희망의 불' 사르는 칠레 와인

도전정신 잃지 않는 두 양조가…포도원에 삶의 열정 바쳐
금주령·강진 암흑기 겪었지만 오묘한 와인 세계로 이끌어

제1편, 역동하는 칠레 와인의 끊임없는 도전

지구에서 가장 길고 좁은 국토를 가진 칠레, 라틴 아메리카의 남서부에 위치한 칠레는 가로길이는 180km에 불과하지만 세로는 무려 4300km의 장신이다. 그렇다고 ‘키 큰 사람은 싱겁다’는 식으로 칠레를 판단하면 오산이다. 동쪽으로는 장엄한 안데스 산맥, 서쪽으로는 태평양, 남쪽으로는 피오르드 해안과 북쪽으로는 아타카마 사막이 있는 매우 다양한 지형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1818년 스페인의 통치를 벗어나 자치 정부를 수립한 칠레에는 잉카문명과 유럽 문화가 공존한다. 바다와 호수, 화산과 빙하, 사막, 그리고 포도 밭들. 칠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야성적이고 매력적인 동시에 순수해서 우리의 호기심과 탐구심을 더욱 유발시킨다.

유럽과 북미의 와인산업이 고전하고 있는 동안에도 칠레의 와인산업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아이디어 넘치는 젊은 세대의 합류와 그들의 실험정신은 칠레 와인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또한 세계적인 와인명가와의 합작품인 프리미엄 와인들은 칠레 와인산업의 미래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칠레는 현재 세계 5위의 와인 수출국이며 한국 와인 시장에서는 점유율 2위의 와인강국이 되었다. 이런 성공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

기쁨의 뒤안길엔 고난도 있었다. 피노체트 독재정권 당시 금주령의 암흑기를 겪은 칠레는 올 초 2월 27일 발생한 리히터 8.8의 강진으로 또 한 번의 혹독한 시련을 맛봐야 했다. 그리고 칠레와인을 전세계에 알리는데 공헌했던 몬테스의 공동 창업자, 더글러스 머레이(Douglas Murray)가 지난 6월 30일 68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 와인주자들은 역경과 자연재해를 딛고 다시 일어서고 있다. 희망의 불을 끄지 않는다면 시련은 도약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 도전은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칠레 와인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산지 별로 다양하게 즐기는 칠레 와인

칠레 와인은 ‘친근한 와인(Friendly Wine)’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숙성기간이 짧아도 쉽게 마실 수 있고 음식과 조화를 잘 이루며 합리적인 가격의 와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칠레 와인의 가장 큰 경쟁력이다. 물론 칠레 와인에도 알마비바, 세냐, 돈멜쵸와 같은 고가의 프리미엄 와인들과 지나치게 실험적인 저가의 와인들이 혼재한다. 선택에 혼란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칠레 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 떨고 싶을 때든, 노을 지는 창가에서 분위기를 잡고 싶을 때든 언제나 친근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최근 몇 년간 가장 떠오르는 지역으로 산 안토니오 밸리가 있다. 태평양의 서늘한 바람은 피노누아, 샤르도네와 소비뇽 블랑을 재배하는데 있어서 최적의 요소인 선선한 기후를 형성한다. 지역 주민들은 이 고마운 해풍을 ‘라스 브리사스(Las Brisas-태평양의 숨결)’라 부른다. 레이다(Leyda), 가르세스 실바(Garcés Silva), 카사 마린(Casa Marin)의 와인들은 천편일률적인 와인에 싫증 난 애호가들이 장바구니에 담아야 할 리스트다.

카사블랑카 밸리는 포도밭이 조성된 1980년대부터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수도 산티아고와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항구도시, 발파라이소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서늘한 해양성 기후에 일교차가 심하며 아침에는 짙은 안개가 낀다. 화이트 와인에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이 지역에선 신선하고 상큼하며 시트러스 풍미를 지닌 소비뇽 블랑과 크림처럼 부드럽고 과하지 않은 미네랄을 지닌 샤르도네가 인기다. 그 중 유기농 와인 생산의 선봉에 있는 에밀리아나(Emiliana), 코포라 그룹의 베란다(Veranda), 남미 특유의 예술 감각이 돋보이는 비냐 마르(Viña Mar), 1996년에 거대한 프로젝트에 기치를 세운 비냐 모란데(Viña Morandé)의 와인들은 추천할 만 하다.

마이포 밸리와 콜차구아 밸리는 칠레와인 산업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종의 포도 나무를 경작하지만 카베르네 소비뇽 재배면적이 각각 6418헥타르와 1만1258헥타르로 주종을 이룬다.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두 지역엔 보르도와 이탈리아 그리고 북미의 자본과 양조 기술이 접목된 포도원들이 밀집돼 있다. 콘차이토로, 알마비바, 까사 라포스톨르, 몬테스, 로스바스코스 와인들은 와인애호가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마이포 강의 남쪽, 해발 700 미터에 세워진 아라스 드 피르케(Haras de Pirque)의 양조장은 말발굽 모양으로 건축의 미와 경마장의 활기를 동시에 보여준다.

곳곳에 강진의 상흔으로 안타까움을 주면서도 빠른 속도로 상처를 극복하고 있는 콜차구아 밸리의 카사실바(Casa Silva)와 쿠리코 밸리의 발디비에소(Valdivieso) 와인들, 카차포알 밸리의 떠오르는 별, 알타이르 (AltaÏr)와 아콩가구아 밸리의 새로운 이정표, 에라쥬리즈(Errazuriz)의 와인들, 그 어느 하나도 놓치기 아깝다.

와인여행의 묘미는 만남에 있다. 새로운 와인은 물론이고 명주를 빚는 장인들을 만나 소통하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자 배움이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큰 수확이라면 비범한 칠레 와인 양조가 두 사람을 만나 잔을 부딪치고 이야기 꽃을 피운 것이었다. 한 사람은 콜차구아 밸리의 비냐 비크(ViñaVik)에서, 다른 한 사람은 마울레 밸리의 라베린토(Laberinto)에서 만났다. 규모로만 보면 두 포도원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와인 양조가의 꿈과 열정은 매우 닮아 있었다. 비냐 비크에서는 무려 240억원이 투자된 거대한 프로젝트가 한창인 반면 라베린토는 칠레 남쪽의 호숫가에 자리한 자그마한 부티크 포도원이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삶의 모든 열정을 포도원에 바치고 있는 두 양조가의 꿈은 한 곳을 향해 있다. 그 꿈의 바탕에 깔린 끊임없는 도전 정신과 열정이야 말로 칠레 와인의 미래가 아닐까.

홀리스틱 서사시, 비냐 비크 (Viña VIK)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위대하다(The whole is greater than the sum of its parts)”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비냐 비크의 프로젝트는 홀리즘(Holism)을 향한 한편의 대서사시처럼 느껴진다. 포도원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홀리즘은 바로 WHOLE에 포커스를 두는데 환경과 사람, 양조기술과 포도밭이 함께 어우러져 창조해내는 ‘위대한 와인’이다. 이 거대한 서사시는 불과 4년 전, 노르웨이의 한 사업가의 꿈에서 비롯됐다. 2006년, 알렉산더 비크(Alexander Vik)는 4325헥타르의 칠레 땅을 사들였고, 보르도의 와인 양조가 파트릭 발레트(Patrick Valette)를 영입했다. 보르도의 명가인 샤토 파비의 전 오너였던 파트릭은 40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25년 간 와인 양조를 해온 칠레인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홀리스틱 와인’을 만들고자 지금까지 들인 투자금액만도 240억. 아직 투자는 끝나지 않았다고 하니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단번에 짐작하는 것은 무리다.

끝없이 펼쳐진 황금의 땅 언덕 꼭대기에 지은 산장은 방문자를 위한 숙소 겸 부티크 호텔로 사용된다. 파티오에 서면 360도의 자연 풍광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모던하고 세련된 목조 건물은 한치의 군더더기도 허락하지 않았다. 1호실은 더욱 특별하다. 전자동 블라인드 스위치를 누르면 사방의 한 면이 자연을 향해 열린다. 하늘 저편으로 칠레 최상의 와인산지인 아팔타의 끝자락이 보이고 공사가 한창 중인 인공 호수가 눈에 들어 온다. 방 한 켠에 마련된 망원경 렌즈에 눈을 대면 소풍 나온 산토끼 가족들을 코 앞에서 볼 수 있다. 포도원에 스며드는 노을은 그 어떤 위대한 화가라도 그려내기 어려운 장엄함 그 자체다.

8월, 늦은 겨울을 녹이는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를 음악 삼아, 첫 빈티지인 2009년산 VIK 와인을 마셨다. 칠레 토착 품종인 카르미네르 65%와 카베르네 소비뇽 35%의 블랜딩으로 만든 레드 와인. 아직 병입 전인 배럴 테이스팅이었지만 경이로웠다. 균형 잡힌 구조에 신선한 과일 아로마, 막 딴 체리와 자두 맛, 부드러운 실크 감촉의 타닌 그리고 지속적인 여운이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우아했다. 평생을 와인에 바친 파트릭은 와인을 마시며 자신의 인생을 나지막이 이야기 했다. 보르도를 떠나 칠레의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 적잖은 나이에 다시 시작하는 새 프로젝트, 자신과 동반자들의 꿈. 그는 VIK 포도원에 대해 “제로에서 시작하는 아름다운 도전”이라고 말했다. 촉촉해진 그의 눈빛이 입가의 잔잔한 미소와 블랜딩되어 와인 잔으로 흘러내렸다.

굴번 호숫가의 미로, 라베린토(Laberinto)

마이포 밸리에서 출발하여 마울레 밸리를 향해 다섯 시간을 자동차로 달렸다. 어둠이 짙게 깔려 사방이 구별되지 않았다. 한참 달리다 보니 귀가 멍멍해져 왔다. 보이지 않아도 고도가 높은 산기슭을 오르고 있다는 것을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비포장 도로였다. 불안이 엄습해올 때 즈음 앞쪽에서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밝혔다. 라베린토라는 작은 부티크 포도원을 찾아가는 우리 일행을 한 남자가 마중 나온 것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다시 500m 정도 달려 그의 작은 성지에 도착했을 때는 허기가 목 끝까지 차 올랐다. 막 오븐에서 꺼내온 홈메이드 파스콸리나(Pascualina-속에 야채를 넣고 구운 큰 페스추리의 일종)를 먹고 나서야 그를 찬찬히 살필 수 있었다.

1966년 산티아고 출생인 라파엘 티라도(Rafael Tirado)는 평범한 사십 대 중년의 남자처럼 보였다.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고, 아이들과 바다에서 보트 타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그가 준비해 놓은 와인들이 테이블에 올려졌다. 와인들은 모두 ‘Laberinto’라고 쓰여 있었고 화이트와인은 연둣빛, 레드와인은 보랏빛 레이블이었다. 라베린토는 ‘미로’라는 뜻이란다. 2007년 산 소비뇽 블랑과 2009년 산 피노누아, 1997년 산 100%의 카베르네 소비뇽, 2006년과 2007년 산 메를로와 카베르네 소비뇽이 블랜딩된 와인들을 시음했다.

2007년 산 소비뇽 블랑을 입안에 넣는 순간 적잖이 놀랐다. 이전에 경험한 칠레산 소비뇽 블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2007년은 라베린토 소비뇽 블랑의 첫 빈티지였다. 오크 숙성을 시키지 않은 이 와인은 3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신선함을 간직한 채 반짝였다. 청명한 연둣빛에 꽃 향이 풍부했고 건초 향이 살짝 배어 나왔다. 기분 좋은 산도는 전체 바디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화려함으로 치장하지 않은 채 단아함과 우아함을 지녔다. 6헥타르에서 3000병 정도 생산됐다고 하니 자주 만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소량의 부티크 와인임을 감안하더라도 좀 아쉽다.

라파엘은 남프랑스와 스페인의 리오하 그리고 나파밸리에서 와인양조의 경험을 쌓았고 현재 비아 와인즈(Via Wines)의 양조가로 일하고 있다. 게다가 와인 양조가가 되면서부터 꿈꿔온 아름다운 그만의 세계를 여기 마울레 밸리의 굴번 호숫가에 풀어 놓았다. 햇살에 눈이 부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에머럴드 빛의 호수에 반사되어 날아온 햇살들은 푸른 빛을 띠었다. 칠레식으로 간단히 조찬을 한 후 라파엘이 설계한 포도밭과 자그마한 양조장을 돌아보았다. 포도밭은 레이블에 그려진 미로 그 자체였다.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뜻 보기엔 야생 동물들이 밤새도록 헤집고 다닌 쑥대밭처럼 보였다. 햇빛이 노출되는 방향을 따라 각각 심은 포도나무들이 하나의 미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의 독창성과 자유로움이 ‘라베린토-미로’라는 이름으로 파란 호숫가 주변에 피어났음을 알아차렸다. 그 때였다. 수리매 한 마리가 포도원 주변의 하늘을 맴돌았다. 라베린토의 귀재, 라파엘의 꿈이 시작된 이곳에서 비상하는 수리매의 꿈과 와인 생산과는 동떨어진 세계에서 날아온 나의 꿈이 오버랩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제2편 ‘오감만족, 칠레’가 이어집니다. 1편에서 언급된 포도원들의 구체적인 와인리스트, 그와 어울리는 칠레와 한국음식들, 칠레의 레스토랑과 칠레 포도원의 놀이문화 등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워싱턴 중앙일보 와인명예기자

김정미씨는…
김정미씨는 한국에서 8년동안 와인전문지 'Winies'를 발행했고, 글로벌 와인아카데미 원장, 보르도 배럴테이스팅 심사위원, 빈이탈리 와인컴피티션 심사위원, 독일 문두스비니 심사위원, 스페인 그랑리오하 심사위원, 시칠리아 엉프리뫼르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일년에 4~5 회 이상 와인산지를 돌며 와인이야기를 생생하게 풀어내는 와인칼럼니스트다. 현재 워싱턴에 거주하며 워싱턴 중앙일보의 와인 명예 기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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