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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금융회사의 명품 리더십-1] 제왕적 CEO의 밝음과 어둠

1인 지배체제에 길들여지면 리스크에 더 약해

우리보다 앞서 걸어간 미국.유럽 금융그룹들도 비슷한 내분을 겪었다. 일부는 잘 수습했고 일부는 파산의 수렁에 빠졌다. 선진 금융그룹의 명품 리더십을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리먼 파산은 폴드 철권통치 때문…성공 CEO가 조직을 사유화하고
반대파 숙청해 다양성 제거하면 시장·환경 변화에 속수무책


월가의 플레이어들은 1994년을 '금융 스캔들의 해'로 기억한다. 오렌지 카운티 파산 등 하루가 멀다 하고 금융 스캔들이 불거졌다. 반면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먼삭스 사람들은 그해를 '리더십 위기의 해'로 기억한다. 수뇌부의 갈등과 알력 때문에 리더십 위기가 발생해 골드먼삭스가 생사의 기로에 서서 흔들거렸기 때문이다.

사태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스티브 프리드먼(73)이었다. 그는 당시 골드먼삭스의 단독 대표였다. 애초 로버트 루빈(72)과 함께 회사를 이끌었지만 루빈이 92년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가면서 프리드먼이 거함 골드먼삭스의 단독 조타수가 됐다. 파트너들은 새 대표를 선정해 공동 대표 체제를 유지하라고 요구했다. 프리드먼은 "내 아이디어와 비전에 따라 회사를 경영해 보겠다"며 단독 대표를 고집했다.

프리드먼은 단독 경영권을 장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전까지 경영권을 두 사람에게 분점시키는 게 골드먼삭스의 전통이었다. 프리드먼의 권한과 영향력은 막강해 보였다. 그의 지휘 아래 주식 인수 자산운용 상품거래 자기자본 투자(트레이딩) 증권 세일즈 부문으로 구성된 '복잡한 유기체' 골드먼삭스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프리드먼은 오너나 주요 주주가 아니었다. 실적을 바탕으로 조직원들의 충성과 주주들의 지지를 유지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누가 내 자리를 넘보지 않을까'하는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자신의 의견을 더 고집했다. 자신이 조금만 약해 보이면 누군가 도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임원들은 트집을 잡아 쫓아냈다. 투자 방향과 전략을 결정할 때도 제왕적 CEO의 행태 그대로였다. 그는 93년 국채 값이 강세를 보인다는 쪽에 베팅했다. 특히 일본 국채 값이 많이 오를 것으로 봤다. 그의 예상대로 국채 값이 오르면서 93년까지 골드먼삭스 순이익은 급증했다. 골드먼삭스는 B급 투자은행에서 메이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프리드먼의 리더십과 성공신화는 뜻하지 않은 사건(리스크)에 의해 무너졌다. 94년 초 앨런 그린스펀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기준금리를 전격적으로 올렸다. 91년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유지해온 저금리 기조의 중단이었다. 일본 경제도 장기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미 지방채와 일본 국채 값이 급락했다. 골드먼삭스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프리드먼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난파선의 쥐처럼 임직원들이 줄줄이 골드먼삭스를 떠났다. 회사 리더십도 공동화됐다. 결국 94년 겨울 프리드먼은 물러났다. 이후 '헨리 폴슨(64)-존 코자인(63)' 공동 대표 체제가 출범해 사태를 가까스로 수습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도 비슷한 위기를 경험했다. 로버트 볼드윈(90)은 70년대 중반부터 83년까지 모건스탠리를 이끌었다. 볼드윈 치세 동안 모건스탠리는 가장 공격적으로 비즈니스했다. 자기자본을 주식.채권.파생상품에 베팅했다. 증권 세일즈 부문을 설치해 증권시장의 새 주역으로 떠오르는 각종 펀드에 주식과 채권을 팔아 많은 수익을 거둬들였다. 모건스탠리는 볼드윈의 지휘 아래 10배 이상 성장했다. 이런 볼드윈의 위세와 공적도 80년 더블딥(이중 침체) 앞에서 무너졌다. 당시 미국과 유럽 경제는 극심한 침체에 빠지고 남미엔 외채위기가 발생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극도의 불확실성에 휘청거렸다. 볼드윈은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증권 인수와 트레이딩 부문 사이에 갈등도 불거졌다. 결국 볼드윈은 83년 축출되다시피 모건스탠리를 떠나야 했다. 절대권력의 몰락은 힘의 공백과 내분을 초래하는 법이다. 로버트 그린힐 등 2인자 그룹이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다. 내분은 회사 위상을 추락시켰다. 모건스탠리는 투자은행 정상의 자리에서 2위 그룹으로 밀려났다.

미 금융 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미국 비즈니스에서 "거대 금융그룹은 지분이 골고루 분산돼 있어 한때 좋은 실적을 보인 CEO가 제왕적 리더로 변하기 쉬운 구조"라며 "망한 금융회사의 표면적인 이유는 투자 실패지만 진짜 이유는 1인 리더십의 한계일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리먼브러더스 파산이다. 리먼은 모기지 관련 자산에 투자했다가 2008년 9월 15일 무너져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리처드 풀드(64)의 철권통치가 파산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애초 리먼브러더스는 골드먼삭스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잘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외부 투자를 제대로 유치하지 못해 끝내 파산했다. 바로 풀드의 독재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조금이라도 위협받을 듯하면 외부 투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고집 앞에선 워런 버핏(80)도 속수무책이었다. 버핏은 골드먼삭스에 앞서 리먼에 투자하려고 했다. 하지만 풀드가 버핏이 단순한 재무 투자자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버핏이 투자는 하되 경영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버핏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는 이사 선임과 경영진 해임 등 주주로서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이다. 풀드가 버핏의 간섭을 싫어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94년 이후 리먼은 그의 리더십 아래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세계 4위 투자은행으로 발돋움했다. 트레이딩 부문에서는 골드먼삭스 다음으로 많은 수익을 거뒀다. 리먼은 '풀드를 위한 풀드의 풀드에 의한' 투자은행이 됐다. 주주들이 따로 있었는데도 말이다.

전 컬럼비아대 경영학 교수인 레너드 세일즈는 CEO의 두 얼굴에서 "한때 좋은 실적을 낸 리더가 권위적으로 바뀌면 회사 조직을 사유화하려고 든다"고 지적했다. 조직의 사유화는 '견제세력 제거→경영 논리.전략의 단순화'를 말한다. 이후 조직은 시장과 환경의 변화에 둔감해지고 위기를 맞는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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