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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수 목사의 중국 선교] 고구려 옛 도읍 방문기 ⑤

압록강변 단동에 사랑의 전설 부활①
장수왕과 연화의 러브스토리…신분·세월의 장벽도 못막아

압록강을 따라 2000년전으로 올라가면 그 시절이라고 해서 전쟁과 슬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환인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단동으로부터 3시간 정도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주몽이 일하던 곳 환인에서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수도인 집안시 국내성으로 옮기고 425년 간 강성대국을 이룬 지역, 19대왕 광개토대왕을 거쳐 20대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를 실행하기 위하여 압록강변의 국내성, 당시 동북아 최대강국인 고구려 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이어서 큰 보람을 느낀다.

그럼 이젠 전설처럼 전승되고 있는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당시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거련(훗날 장수왕)은 오녀봉 청석골 석공장의 딸 연화를 무척 사랑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두 사람에게 큰 시련이 닥쳐 왔다. 그것은 태자의 신분을 숨기고 만난지 2년쯤 되던 시절이다. 갑자기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승하하면서 졸지에 왕위를 승계 받아 광활한 고구려의 제20대 왕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연화에게는 절망의 소식이 됐다. 매우 천한 신분인 연화는 처녀의 몸으로 후궁으로도 들어 갈수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연화는 고구려왕으로 즉위한 장수왕 근처에도 접근 할 방법이 없었다. 할수 없이 연화는 성밖에서 절망과 슬픔을 머금고 오로지 임이 성군이 되시기만을 기원할 뿐이였다.

물론 장수왕 역시 바쁜 국사를 뒤로 한 채 첫사랑의 연화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그녀를 다시 만날까 하는 궁리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묘안을 찾았다. 연화의 아버지를 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 왕실에 관습은 왕이 죽은 뒤에 후임 왕이 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임 중에 미리 자신의 묘를 만들어 놓았다. 이같은 궁궐 관습을 명분으로 장수왕은 오녀봉 석공장이였던 연화의 아버지를 왕릉 건축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묘를 거대한 피라미트 형태의 석묘로 만들었다.

장수왕은 이를 계기로 사랑하는 연화를 자주 만나고 그 아버지 석공장이를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였다. 결국 그들은 영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오녀산봉에서 돌을 운송할 수단이 없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장수왕은 그러나 끝까지 이를 고집하여 관철시켰다고 한다.

왕릉의 건축이 끝나자 이번엔 더 큰 시련이 다가왔다. 즉위후 14년차에 고구려가 평양 천도를 결정한 것이다. <계속>

신동수 목사 프라미스랜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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