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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보다 독자 가슴에 남기를 바란다"

마종기 시인 문단데뷔 50주년 시작 에세이집 출간
이민자의 외로움, 고국 그리움 가득 담은 고백록

“문학에 대한 막연한 취미 만으로는 그 긴 세월 시인으로 살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만큼 미국 생활과 의사 생활이 내 시의 근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 마종기(71·사진)씨가 최근 문단 데뷔 50주년을 기념한 시작(詩作) 에세이집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비채 간)와 열두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문학과 지성사 간)을 출간했다.

‘당신을…’은 모국어로 글쓰기로 이민자로서의 외로움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온 마씨의 인생을 담은 고백록이기도 하다. 어느 비평가가 이민자와 의사로 40여년 살아온 마씨의 시 세계를 심도있게 분석할 수 있을까? 그는 매일 낮 죽음을 목도하는 의사였고, 밤마다 별을 보며 시를 짓는 미주 한인이었다. 누가 그의 독백을 100%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마 시인이 직접 시작의 체험을 말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44년을 살아온 이민문학의 거목(巨木)은 그만의 독특한 가족사와 이민, 그리고 의사라는 체험이 승화된 자작 시를 해설한다. 시력 50주년을 맞은 마씨는 ‘당신을…’에서 자작시 50편을 골라 시의 배경을 독자에게 나긋나긋하게 들려준다. 그의 ‘온유한 속삭임’은 외침과 고함으로 오염된 문학세계에서 은은한 향기와 묵직한 존재감을 주고 있다.

◇이민자와 모국어=마씨에게 ‘당신’은 누구일까? 한용운이 ‘님의 침묵’에서 애달프게 부른 조국일까 아니면 연인일까? 아니면 시(詩)인가, 구세주인가?


“많은 이민자들이 그렇듯 수십년 동안 두개의 다른 나라에서 내 삶을 살았다.

비록 몸은 외국에 있어도 집에서는 모국어를 사용했고, 잠꼬대도 모국어로 했고, 꿈도 대부분 모국이 배경이었다(중략) 내 생활은 이렇게 두 나라의 살림이었고 두 개의 일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두 나라가 모두 편안하지 않았다. 내가 자꾸 외계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디에 놓아도 풍각쟁이나 희극배우 혹은 패배자 같이만 생각되었다. 나는 점점 혼자가 되어갔고, 그건 꽤나 참담한 느낌이었다.”(49쪽)

마씨는 2006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시는 내게 위로와 힘을 주었다. 한국인이 별로 없는 중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미국 의사들과 매일 부딪히며 미국 환자들을 보며 영어로만 생활해야 하는 고된 미국 생활에서 모국어를 다듬으며 모국어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시를 쓰는 시간은 내게 축복일 수 밖에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바람 부는 언덕에서, 어두운 물가에서/ 어깨를 비비며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마른 산골에서는 밤마다 늑대들 울어도/ 쓰러졌다가도 같이 일어나 먼지를 터는 것이/ 어디 우리나라의 갈대들뿐이랴” -시 ‘밤노래’ 중에서-

시인은 말한다. “내 시가 독백이고 주장이고 진심이고 노래이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한 편의 시를 쓴다. 나는 내 시가 내 옷이 아니고 훈장이 아니고 군마가 아니고 명예가 아니기를 바란다.(중략) 오래 전 고향을 떠난 나그네가 옛 집터를 서성이며 뒤뜰의 들꽃 한 송이에 마음을 주듯, 누군가 내 진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난간=“환자들의 생과 사를 보면서 사실은 내가 시인이 되었다. 만약 내가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시인의 생명은 길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내가 고국을 떠나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열심히 시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씨는 1966년 미국 이주 후 5년간 10여편의 ‘증례(case study)’라는 시를 썼다. 환자들의 부검까지 들어가 그들의 삶과 죽음을 목도하고 기록해가면서 평생 시의 목표가 생기게 된다. 마씨는 ‘그것이 생명, 사랑, 희망, 하느님이었으며 무조건적인 인간의 이해심과 베풂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체험을 통한 현장의 은유야말로 살아있는 시를 만드는 새로운 질료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진정성을 갖춘 문학이라고 믿었다”고 쓰고 있다. “행동이 밑바탕이 되지않는 문학은 공중누각이고 세상에 필요없는 문학이었다. 골방에만 박혀서 하루하루의 질박한 삶을 외면하는 의식의 조작이 아니고,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것만이 진정한 시의 길이라고 믿었다.”(45쪽)

모국어로 글쓰기는 변방에 살고 있는 의사 시인에게 위로였을 뿐만 아니라 생의 나침반이기도 했다. “나는 오랜 세월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모든 기쁜 일과 슬픈 일과 어려운 일도 당신과 함께 하리라고 믿으며 살아왔다.(중략) 바람이 분다. 나는 이 바람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련다.

시인은 언제나 헐벗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찢어진 헌 옷의 남루가 아니고 정신의 상처 때문에 피 흘려서 온몸이 추워야 한다는 말, 한여름에도 심장에까지 추위와 외면의 소름이 퍼져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두려움 없는 시인이 되고 싶다. 자유로운 시인이 되고 싶다.”

◇당신, 그리운 그 이름은=“내가 낳지도 않고, 평생의 절반도 살지않은/ 그러나 언제나 내 삶의 중심에서 나를 지탱해준 조국/ 세상의 모든 비바람을 피해 늘 의지해온 내 조국에게/ 오래 다져온 사람과 그리움으로 이 책을 삼가 바칩니다.”(첫머리에)

마씨는 1939년 일본 도쿄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1905∼66)씨와 현대무용가 박외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59년 현대문학에 ‘해부학 교실’로 데뷔한 후 이듬해 첫 시집 ‘조용한 개선’을 출간했다.

시인 대신 의사의 길을 걷기위해 연세대 의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마쳤다. 1965년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한일국교 정상화에 반대 서명했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발설하면 목 베어가던 시절, 마씨는 정보부에 침묵을 조건으로 도미행을 허락받았다.

단돈 50달러를 들고 오하이오로 이주한 마시는 이듬해 부친의 부음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던 아들이었다.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에 이주해 벗이 되었던 남동생은 무장강도에게 목숨을 잃는 비극도 겪었다.

오하이오주 톨레도 아동병원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환자들을 돌보다가 2002년 은퇴해 전업 시인이 됐다. 플로리다주 올란도에 살면서 한 해의 절반은 고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영구귀국은 아직도 의문부호로 남아있다.

그 와중 한국에는 ‘마사지(마종기를 사랑하는 지하조직)’이라는 팬클럽도 생겨났다. 아버지의 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세 아들 대신, 독자들을 고마워하고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마씨. 변방에서 모국어로 노래해온 노장 시인의 바람은 하나 뿐이다.

“나는 내 시가 한국의 문학사에 남기보다는 내 시를 읽어준 그 사람의 가슴에 남아주기를 바란다.”

박숙희 기자 suki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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