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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임원의 리더십] 임원진 8명 중 5명이 여성인 한국릴리

임원 방·책상 없애고
출근시간 마음대로
'꿈의 직장' 만든다

미국계 제약회사 한국릴리의 김선정(42) 상무는 오전 7시30분쯤 집에서 컴퓨터를 켜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미국 변호사 출신으로 지난해 11월부터 재택근무를 하는 김 상무에겐 집이 사무실이나 마찬가지다. 회사의 지원을 받아 초고속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와 전화.팩스.프린터 같은 사무기기를 모두 갖췄다.

김민영 부사장 "회의와 겹칠 딴 졸업식, 상사가 등 떠밀어 참석"
김은자 부사장 "최근 5년 여성 리더 급증…일본선 '롤모델'로 삼아"
김선정 상무 "일·가정 병행 재택근무, 집중력 극대화해 만족"
이수진 상무 "'삶의 질' 단어 익숙한 일하는 여성의 천국"
최재연 상무 "'여자라서 안 된다' 없고 '여자니까 봐준다'도 없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 4시까지 집엔 혼자 있다. 자유 복장이어서 가끔 파자마(잠옷) 차림으로 일할 때도 있다. 회사에 따로 방이 있지만 특별한 일이 아니면 출근하지 않는다. 그 방은 김 상무보다 다른 부서 직원들이 회의실로 쓰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김 상무는 "법무담당이란 업무 특성상 주로 혼자 일하는데 사무실보다 집에서 훨씬 집중이 잘 된다"며 "재택근무로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할 수 있고 출퇴근 교통혼잡에도 시달리지 않아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같은 회사의 김은자(42) 부사장은 오전 10시 전엔 회사에서 얼굴을 보기 어렵다. 그는 매일 아침 고교생 자녀들에게 아침식사를 챙겨 주고 느긋하게 회사에 나온다. 탄력근무제를 선택한 김 부사장의 정식 출근시간은 오전 10시다. 릴리 직원들은 3개월마다 오전 7시부터 10시 사이에서 본인에게 맞는 출근시간을 정할 수 있다. 그는 "남들이 보면 부사장의 출근시간으론 너무 늦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며 "하지만 임원이 유연하게 모범을 보여야 직원들도 제대로 탄력근무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릴리는 일하는 여성들에게 '꿈의 직장'으로 손꼽힌다. 재택근무나 탄력근무 같은 여성친화적인 제도를 실시하기 때문 만은 아니다. 이 회사에선 의사결정의 A부터 Z까지 여성의 목소리가 중요하게 반영된다. 직원들에게 몸바쳐 일하지 말고 '일과 가정의 균형'을 생각하라고 권유한다. 직원들은 육아 때문에 일을 포기할 이유도 일 때문에 가정을 방기할 필요도 없다.

'여성 직원의 발전이 곧 회사의 발전'이란 이 회사의 모토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임원 구성에서도 확실히 드러난다. 전체 임원 8명 중 여성이 5명으로 과반수를 차지한다. 외국인 사장.부사장을 제외하고 한국인만 따지면 남녀 임원 비율은 1대 5까지 벌어진다. 릴리의 여성 임원 5인방을 만났다. 김민영(마케팅).김은자(대외협력) 부사장과 김선정(법무).이수진(재무회계).최재연(인사) 상무다. 이들은 근속 연수가 길게는 8년 짧게는 1년에 불과하다. 5명 모두 공채 출신의 '순혈'이 아닌 외부 영입파란 얘기다. 출신 학교가 모두 제각각인 이들에겐 학맥에 의한 줄서기나 편가르기도 없다.

김은자 부사장은 "2005년 이전만 해도 여성 임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임원 구성에서 여성이 다수가 된 것은 최근 5년 사이에 일어난 큰 변화"라고 말했다. 그는 "출장 때문에 일본릴리에 가 보면 그곳 여직원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며 롤모델로 삼고 싶어 한다. 일본릴리는 한국보다 문화가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아직도 여성 임원을 배출하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많은 기업이 '남녀 평등'이나 '일과 가정의 균형'을 얘기하지만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경우가 많다.

김민영(43) 부사장 "재작년 미국 본사에서 상당히 높은 상사가 한국에 왔다. 회의시간이 공교롭게도 딸의 중학교 졸업식과 겹쳤다. 딸에겐 미안했지만 '못 간다'고 말해 뒀다. 그런데 상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중학교 졸업식은 평생 한 번 뿐이다.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이 정도로 개인 생활을 존중해 주는구나 싶어 감격스러웠다."

이수진(39) 상무 "사실 릴리가 세 번째 직장이다. 첫 번째 직장인 회계법인에선 회사생활이 무엇인지 배웠고 두 번째 직장인 자동차 부품회사에선 기업이 돌아가는 방식을 배웠다. 그런데 릴리로 와 보니 QOL을 강조하기에 처음엔 깜짝 놀랐다.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뜻하는 영어 약자인데 릴리 직원들에겐 매우 익숙한 단어다. 그만큼 '일과 가정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얘기다."

최재연(37) 상무 "릴리는 성별과 직급을 초월한 수평적 관계를 기업의 핵심 가치로 강조한다. 사장부터 평사원까지 직함을 붙이지 않고 '○○님'으로 부른다."

-여성 임원이 다수인 경우는 외국계 기업에서도 흔치 않다.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최 상무 "대학에 취업설명회를 나갈 때마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을 만든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러면 '내가 여성이란 사실을 느끼지 않게 하는 회사가 좋은 회사'라고 답한다. 릴리는 남자냐 여자냐보다 얼마나 능력이 있고 좋은 실적을 올렸느냐를 중요하게 본다. 성별과 관계없이 공평한 기회를 준다는 얘기다. 다른 기업에선 여자라서 차별도 있겠지만 힘든 일을 시키지 않고 봐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릴리에선 '여자라서 못한다'는 말이 절대 나올 수 없다."

-릴리의 다른 나라 법인에서도 한국처럼 여성 임원의 비중이 높은가.

김은자 부사장 "한국 같은 경우는 흔치 않다. 예컨대 아랍권에선 문화적 차이 때문에 여성 직원의 채용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아시아여성네트워크(AWN)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내가 회장이고 나라별로 집행위원이 있다. AWN의 핵심 정책은 임원을 포함해 빈자리가 생기면 여러 후보 중 적어도 한 명은 여성이 포함되도록 하는 것이다. 여성이 후보에 올랐다는 것이지 채용이나 승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에게도 최소한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제도다."

-임원도 재택근무를 하는 것이 특이하다. 재택근무의 좋은 점은 뭔가.

김 상무 "지난해 2월 릴리에 입사했는데 그해 11월부터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특히 외국과 업무 연락이 많은 경우엔 재택근무가 매우 편하다. 나는 업무상 직속 상사가 오스트리아 빈에 그 위의 상사가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집에서 국제전화로 회의할 때가 많다. 재택근무는 결코 일을 적게 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출퇴근이 따로 없어 근무시간으로 따지면 더 길어지기 쉽다."

이 상무 "2년 전 재택근무를 해 봤다. 직장생활에서 최고의 황금기였다. 외국과 연락이 주업무였으니 한국 사무실엔 나올 필요가 거의 없었다."

최 상무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재택근무 희망자 신청을 받는다. 현재 10명 정도가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간혹 재택근무를 하다가 외로움을 느끼거나 자기 관리가 어렵다며 돌아오기도 한다. 인사부에선 업무의 효율성을 기준으로 재택근무를 허용한다. 기준이 육아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엄마가 근무시간에 아기를 본다면 업무에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탄력근무제는 얼마나 활성화돼 있나.

김민영 부사장 "한때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했다. '아침형 인간'이라 오전에 집중이 더 잘돼서다. 퇴근 후엔 학원을 다니며 자기 계발을 하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도 있어 좋았다. 지금은 오전 9시30분에 출근해 오후 6시30분에 퇴근한다. 담당 업무가 마케팅인데 혼자선 할 수 없다. 팀원이 가장 많이 회사에 있는 시간에 맞춰 근무시간을 정했다."

이 상무 "탄력근무의 핵심은 유연성이다. 개인 사정과 업무 특성을 동시에 고려한다. 몇 시 출근 몇 시 퇴근이냐보다 자신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유연하게 결정한다."

-유연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계 기업이라선가.

김은자 부사장 "릴리는 미국에서도 여성들이 선호하는 회사로 정평 나 있다. 미국에선 '워킹 마더'라는 잡지가 매년 '일하는 엄마를 위한 가장 좋은 기업'을 꼽는데 항상 10위 안에 들어간다. 포춘이 선정하는 '가장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에도 늘 포함된다."

-출퇴근 외에 다른 부분에선 얼마나 유연하게 하고 있나.

최 상무 "9월 말 사무실을 옮길 때 획기적인 변화를 계획하고 있다. 여기 있는 임원들의 방도 책상도 다 없어진다. 회의가 있으면 회의실로 가고 따로 업무를 볼 공간이 필요하면 빈자리를 돌아가며 쓰면 된다. '모바일 오피스(이동식 사무실)'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다만 업무 특성상 한자리에서 계속 근무하는 직원들에겐 책상을 주기로 했다. 그 결과 임원 책상은 빼고 비서 책상은 남기는 일이 벌어지게 됐다."

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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