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 김정겸 탑드릴 사장, 드릴로 금녀의 땅을 뚫다

저소음·저진동 해머·비트 "확실히 돈 받을 곳에만 팔았죠"

수출 비중 90%로 높여 도약…씨티-중기원 여성기업인상 수상
사람 못 찾아 비싼 기계 놀려…중소기업 설움 톡톡히 맛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변변한 직장도 없는 애 딸린 서른여덟살 여자가 살기에 한국은 팍팍했다.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늦깎이 대학생이 됐지만 거기까지였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6년을 버티다 97년 호주 이민을 결심했다. 남편이 물려준 유산으로 오피스텔이 있었다. 세입자는 드릴에 들어가는 해머(Hammer).비트(Bits)라는 부품을 호주에서 수입해 파는 사람이었다.

호주 사정이라도 들어볼까 해서 만난 자리에 그가 친구라며 한 남자를 데리고 나왔다. 그 남자 유난히 눈이 맑았다. 엔지니어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해머.비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해 전에 5년간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를 냈다고 했다. 제품과 기술에는 문제가 없었다.

흑자 부도였다. 동업자였던 그 남자의 친구가 회사를 방만하게 운영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가족조차 빚더미에 신음하던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 남자의 열성적 태도가 묘하게 마음을 움직였다. 해머.비트라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그녀였다. 그렇지만 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이 보이는 듯 싶었다. 그녀는 3회 '씨티-중소기업연구원(KOSBI) 여성기업인상 기업가정신상'을 수상한 김정겸(51) 탑드릴 사장이다. 그 남자는 지금 그녀의 남편이다.



"제조업의 핵심은 제품과 기술력이죠. 그런데 기술이 있다고 경영도 잘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기술과 경영은 구분해서 생각해야죠. 왜 가끔 있잖아요. 기술이 있고 제품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재무.영업 등 관리를 잘못해 실패하는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들요."

김 사장이 한국에서 찾은 희망은 지금 남편이 가진 기술력이었다. 해머.비트는 건설 기초공사에 필요한 천공 곧 땅에 구멍을 뚫는 드릴에 들어가는 장비다. 당시 해머.비트는 해외산이 대부분이었다. 그 일부라도 한국산으로 돌릴 수 있다면 승산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김 사장은 사업성이 보인다고 덥석 물지는 않았다. 97~98년은 외환위기로 건설경기가 바닥을 치던 시절이다. 자금도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한번 망하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다.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대신 남편의 전 거래처를 관리하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 99년 건설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해 9월 돈을 끌어모아 경기도 시화공단에 660㎡(약 200평) 공장을 계약하고 컨테이너 박스를 사무실로 꾸몄다. 중고기계 3대를 그것도 할부로 샀다. 창립 멤버도 단출했다. 김 사장과 남편 기술자 3명이 전부였다. 시작은 순탄했다. 성능은 비슷한데 해외에서 1000만원 주고 사오던 걸 탑드릴은 500만원에 팔았다. 주문이 밀렸다.

"다행히 시장 진입에는 성공했죠.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내가 가만히 있는데 남들이 다 앞으로 가면 내가 뒤처지는 거잖아요. 회사가 크려면 뭔가가 필요한데 잘 잡히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한번은 공사 현장에 갔는데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살 찌푸리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후엔 공사 현장의 진동이나 소음에 관한 민원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고요. 요즘 어디 외딴 데다 집 짓나요? 다 시내에 짓지. 이거다 싶었죠."

2002년부터 소음.진동을 줄인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이듬해 시제품이 나왔는데 대박이었다. 일부 자치단체에서는 민원 발생을 우려해 천공 작업 때 탑드릴 제품이 아니면 허가도 안 내줄 정도였다. 2003년부터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 밀려드는 주문은 반가운데 비좁은 공장이 문제였다. 컨테이너 사무실은 초라했다. 주문량을 소화하려고 사람 더 뽑자 해도 공장에 와 보고는 뒤도 안 보고 도망을 쳤다. 번듯한 공장이 필요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변변한 담보도 없는 설립된 지 5년도 채 안 된 회사에 은행 문턱은 높았다. 사장이 여자라는 것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외환위기 때 망한 기업의 경영자들이 아는 여자를 '바지 사장'으로 내세워 회사를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은행이 김 사장을 바라보는 시선도 딱 그만큼이었다.

"뒤에 자꾸 누가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러는 거예요. 억울했죠. 내가 키운 회사인데. 그런데 생각해보니 은행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돈 떼이면 다 자기들 책임이니. 그래서 대출 안 해줘도 좋으니까 한 번만 회사로 와달라고 사정했죠. 공장 돌아가는 걸 보면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어요."

그리고 은행은 지점의 최대 한도만큼 김 사장에게 대출을 해 줬다. 660㎡에서 시작한 공장은 2004년 3300㎡(약 1000평)으로 늘어났다. 본격적으로 매출을 늘려보려는데 탑드릴 제품을 베낀 경쟁업체들이 싼값을 무기로 시장을 파고들었다. 시장 점유율도 줄고 무엇보다 마진이 줄었다. 한국에서는 답이 없었다. 김 사장은 길은 해외에 있다고 판단했다.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추진했다. 팸플릿 한 장 들고 중장비 기계 부품 전시회를 찾아갔다. 처음엔 출장비만 날리고 오는 꼴이었지만 차츰 매출로 이어졌다. 미국.중국.러시아.남아공 등 전 세계 40여 개국에 수출한다. 전체 매출액의 90% 정도가 해외에서 나온다. 해외 판로 개척으로 2005년 32억원이던 매출액은 2008년 63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지금도 전시회에는 매년 3회 이상 참가한다.

그러나 탑드릴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부동산 경기 침체에서 비켜가기 힘들었다. 지난해 매출액은 58억원으로 2008년에 비해 줄었다. 그나마 경쟁 업체들이 벼랑 끝에 몰린 것에 비하면 선방한 것이다. 리스크 관리에 철저한 김 사장의 경영 스타일 덕이다.

"여자가 어떻게 그것도 드릴 부품 만드는 거친 회사를 운영하느냐는 소릴 들어요. 여자가 추진력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꼼꼼하고 신중하니까 기업 운영하는 데는 더 맞을 수 있다고 봐요. 키코(KIKO.선물환 통화옵션) 때문에 여기 공단에 있는 회사들이 휘청거렸지만 우리 회사는 멀쩡했어요. 제가 단 한 푼도 키코 가입을 안 했거든요. 은행이 가지고 온 계약서를 보니까 환율이 오르면 돈을 엄청 잡아먹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땐 저보고 '바보'라고들 했지만 지금 보니까 제가 잘한 거죠."

또 회사 덩치를 키우려고 무리수를 쓰지도 않는다. 해머.비트는 건설 기초장비라 꼭 필요하지만 일단 기초공사가 끝나면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래서 건설업자가 자금 압박에 시달리면 차일피일 대금 지급을 미룬다. 김 사장은 그래서 확실히 돈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면 물건을 안 판다. 올 들어 대형 건설사마저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탑드릴이 받은 어음 가운데 부도가 난 것은 총 1억2000만원에 그쳤다.

김 사장의 요즘 가장 큰 걱정은 사람이다. 지난해 투자한 기계 설비 3대 중 1~2대는 그걸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놀리고 있다. "지난번에는 보링머신(이미 뚫려 있는 구멍을 둥글게 깎아 넓히는 작업을 주로 하는 공작 기계)이라는 비싼 기계를 들여 놓고도 사람을 못 찾아 7개월 동안 놀렸어요. 그리고 사람을 찾긴 했는데 그 직원도 얼마 안 가 그만둬서 결국 팔아버렸죠. 중소기업 하는 설움이죠."

김 사장은 그래도 꿈꾸는 걸 잊지 않는다. 꿈이 없는 기업에는 그리고 경영자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이 뭐냐고 물었다.

"3만3000㎡(약 1만 평) 대지에 공장을 짓는 거예요. 여기에는 공장도 있고 호텔 뺨치는 기숙사 기술자를 양성할 수 있는 학습훈련장 직원들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아트홀.축구장.의료시설 등이 들어가죠. 이 꿈 때문에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 수 있는 겁니다."

고란 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