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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아, 그날이여!

6·25 60주년기념 수필 공모

1950 년 6 월 27 일,

어머니는 서울 혜화동 이모 집에서 걸어 걸어 인천 집으로 돌아 오셨다. 만일 다음 날 떠났더라면 아마도 어머니는 불귀객이 되었으리라. 6 월 28일 새벽 3 시 한강교는 폭파되었고 숱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에선 전쟁이 났다고 시민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피난을 떠나는 사람 들이 갈팡 질팡 길을 메우고 북새통을 떨었다. 어머니는 죽어도 가족과 같이 죽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새벽녘에 이모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저녁 밤 늦게 인천 집으로 돌아 오셨으니 100리 길을 꼬박 걸으신 것이다.

개나리 봇 다리 하나를 머리에 달랑 이고 인천 집으로 들어 오시자 어머니는 그만 몸을 가느지 못하고 쓰러 지셨다. 얼굴엔 땀과 흙 먼지에 쌓여 분장한 배우의 얼굴 처럼 참담하게 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몰골을 보시고 화를 버럭 내 셨다.

“ 뭐 하러 내려 와 서울에 가만이 있지 .”

“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서울은 인민군이 처 들어 온다고 야단 난리가 났는데 죽어도 같이 죽자고 온 사람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어머니는 힘 없이 중얼거렸지만 악에 받쳐있었다.

어머니의 죽어도 같이 죽자는 말은 우리 가족에게는 의미가 담겨있는 말이다.

나의 고향은 장화 홍련전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철산 이다. 고향에서 우리 집은 2000석 정도의 부농으로 남 부러울 것 없이 잘 살았다. 그러다 1945 년 8 월 해방을 맞았다. 북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우리 집은 초 죽음이었다. 공산 당원들은 아버지를 일제시대 때 일본놈의 앞잡이고, 농민을 착취한 반동 분자라고 몰아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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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기가 막힌 일은 그렇게 순하고 착하던 우리 집 소작인들이 아버지의 목에 낫을 들이대고 생명을 위협했다. 소작인들은 공산주의라는 단어도 알리 없었다. 공산당원들은 소작인들을 혁명의 주체세력이라고 추겨 세우고 그들을 이용하여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공산당원들의 술수에 우리 가족은 죽음 앞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낮 12 시 까지 집을 비우라는 통지 문이 우리 집 대문 앞에 붙었다. 집은 군 인민위원회 에서 접수 한다고 했다. 이들은 우리 가족을 고향에서 멀리 떠나 중강진 이라는 벽촌으로 이주 하라고 지시 했다. 반동분자는 과거 농민을 착취한 만큼 고통을 받으며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한다는 것 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데리고 남으로 떠나기로 결심 했다. 벽촌에 가서 고생고생 하다 죽으니 보다 죽기를 각오하고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 가기로 했다. 아버지는 남으로 내려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판단이 옳았고, 아버지는 현명했다.

우리 가족은 1948 년 7 월 초, 38 선을 넘어 자유 대한으로 내려 왔다. 그리고 조카가 살고 있는 인천에 터를 잡고 정착 했다. 그야 말로 월남 피난민이 된 것이다.

그런데 기구한 운명은 북에서 내려 온지 2 년 만인 1950 년 6 월 25일 공산당이 남으로 처 내려 오다니 북에서 도망하다 싶이 남으로 내려온 우리 식구는 불안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북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온 우리 식구를 반동분자라고 몰아쳐 죽이지 않겠는가 하는 두려움 속에 가족과 같이 죽겠다는 어머니의 기막힌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으리라.

그 때 나는 12 살이 였고, 인천 축현 국민학교 5 학년 이였다. 북에서 김일성의 인민 학교를 3학년 까지 다니다 남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북한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배운 북한의 국어 교과서에는 미군을 “ 양코백이 ”라고 증오하며 코를 크게 그려 놓고 미국 놈들을 다 함께 찔러 죽이자며 총 검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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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 책에도 마찬가지로 10명의 미군을 인민군이 몇 명을 때려 잡으면 몇 명이 남는가 하는 식의 도전적이고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전쟁 교육이 였다.
나는 남으로 내려와 그야말로 판이하게 다른 민주 교육을 받았다. 예를 들면 사과 10 개가 있는데 철수가 두개를 먹으면 몇 개 남지 하는 식의 교육에 나는 흥미를 느꼈다.

그런데 나는 이북 사투리 때문에 반 아이들 한테 많은 놀림을 받았다.

하여간 우리 가족은 피난 생활을 잘 꾸려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원래 장사꾼이 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인천 중앙시장 입구의 배다리라는 곳에 터를 잡고 고무신 장사를 했다. 배다리라는 곳은 원래 인천이 개항 직전 배가 닿은 곳이라 해서 배다리라고 불렀다. 그러다 대한 제국이 최초로 경인철도를 놓을 때 바다를 메우고 뚝을 쌓고 철로 다리를 만들었는데 그대로 배다리 라고 했다. 배다리는 지역적으로 육로로 서울에서 인천으로 들어 오는 관문이다. 주안에서 국도를 따라 들어 오면 배다리에 이르는데 사방 팔방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배다리 뚝 넘어는 바다 물이 들어 오는 갯벌이 였는데 방죽을 쌓고 흙을 메웠다. 그 터에 시장이 크게 형성이 되어 주변 촌락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다 보니 시장이 점점 커저서 중앙 시장이 형성되었다.

철로 따라 올라 가면 동인천 역이 나온다. 우리 집은 동인천 역 못 미처 철로 뚝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쩌다 기차를 타거나 내릴 떼에는 역 구내로 들어가지 않고 기차 철로로 되돌아 나와 뚝 밑인 우리 집 뒷 문으로 들어 오면 되었다. 동인천 역에서 위로 올라가면 내가 다니는 축현 국민하교가 있고 그 위로 더 올라 가면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있는 만국 곻원(지금의 자유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 서서 인천 앞바다를 훤이 바라 볼 수가 있다.

배다리 철둑 옆에 파출소가 있는데 네거리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파출소는 항상 소란했다. 그 파출소 바로 앞 길 건너에 우리는 공터에 판자로 가계를 짓고 고무신 장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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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주로 검은 고무신이 였고 흰 고무신은 귀했다.
인천 주변 촌 사람들이 농사지은 쌀, 조, 보리, 닭 등 농산물을 가지고 와서 고무신과 바꿔가는 물물 교환의 수단이 많았다.

당시 나는 개구장이 였고 사고 뭉치였는데 우리가 하는 고무신 장사 보다 가계 앞 배다리 파출소에서 일어 나는 사건들이 흥미로웠다. 죄인들인지 많은 사람들이 파출소로 잡혀 들어 갔다. 얽어 매고, 수갑이 채워지고, 형사들이 발갈로 차고 줘어 박고 때리는 소리가 우리 고무신 가계까지 들려왔다. 그럴 때면 나는 호기심에 파출소로 달려가 창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곤 했다. 그런데 잡혀 오는 사람들이 도둑질한 사람 같지 않고 젊은 학생들이 많았다.

어느 날 파출소 안을 언 듯 들여다 보았는데 학교 반 친구의 누나가 잡혀 왔다. 인천 여중을 다닌다는 누나인데 형사들이 누나의 가방을 뒤집더니 무언가 종이 뭉치를 꺼내 얼굴에 들이 대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착하게만 보이던 그 누나의 살기스러운 눈매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 종이가 삐라였으리라. 나중에 안 일이지만 누나는 인천 여성동맹의 말단 세포였다고 한다. 인천에는 지방 빨갱이가 많았는데, 그중 명문 인천 중하교, 인천 여중 선생들이 많았다. 이들 공산주의 자들은 남노당 계열로 인민군이 인천에 들어오기 전에 사전 지하 공작을 하고 교란 작전을 했다고 한다.

7 월 초

어머니가 서울에서 내려 오신지도 몇 일이 지났다. 어머니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 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소식통에 의하면 서울은 인민군이 들어와 완전 빨갱이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인천은 아직 인민군은 들어 오지 않았다. 시내는 너무 조용했다. 배다리 파출소는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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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막이 흘러 소름이 돋았다. 어느새 배다리 파출소의 경찰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적막감이 들어찼다.

밤이면 북쪽 멀리에서 섬광이 번득이며 포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흙 빛으로 변했다. 공포에 떨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몰랐다. 12 살 짜리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위를 알리가 없었다. 헌데 전쟁이 나고 우리가족에게 어떤 재앙이 닥쳐 온다는 사실은 느낌 으로 알 수 있었다.

7월의 태양은 강열하게 초목을 불 태우고 있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인민군은 남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인천은 비껴가고 있었다. 그저 낙동강을 향해 진격 했다. 부산을 점령하면 전쟁은 끝나는 것으로 믿고 밀어 붙첬다.

인천의 소시민들은 전쟁은 어떻게 되건 살기 위해 예나 다름 없이 부단이 움직이고 있었다. 촌 사람들은 쌀이며, 보리며, 감자 고구마를 가지고 중아 시장으로 몰려왔고, 우리 집은 고무신 장사를 계속했다. 장사가 잘되다 보니 얼마 전 가계에 도둑이 들었다. 가게 판자를 뜯고 고무신을 훔쳐 간 것이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는 가계를 지키기 위해 저녁이면 가계에 나가 잠을 잤다. 저녁을 먹고 나면 나는 아버지와 함께 가게로 나가 공부를 하고 아버지는 하루 매상 장부를 정리하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 날밤 나와 아버지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었다. 아니 죽음을 맛 보았다.

새벽이 었을가 멀리서 굴렁쇠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에서 희미하게 소리가 들리더니 점차 소리가 거칠게 울려왔다. 틀림 없이 인민군 전차였다. 인민군 6 사단의 전차들이 인천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저항을 받을리 없다. 썰물이 빠져 나가듯 인천엔 국군의 흔적도 없이 후퇴를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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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거리는 전차가 배다리 앞까지 와 섰다. 어느 쪽으로 갈까 사방 팔방으로 나 있는 길을 선택하기 위해선지 전차는 정지하고 포신을 좌우로 돌리고만 있었다.
나와 아버지는 판자 문틈 사이로 밖을 내다 보았다. 분명 인민군 전차였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집채만한 인민군의 전차가 서있는데 공룡같이 보였다. 앞에는 포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또 뒤에서 덜컹거리는 쇳 소리가 들려 왔다. 계속 전차가 들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나타난 전차가 갑자기 배다리 파출소를 들이 받는 것이 었다. 파출소가 부서지는 파열음의 소리는 엄청나게 울려 퍼졌다. 벽돌로 쌓은 파출소가 구멍이 뻥 뚫리더니 전차가 파출소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파출소는 완전 박살났다.

그리고 뒤로 후진이 잘 되지 않는지 강한 엔진소리가 나더니 전차가 뒤로 빠른 속도로 쑥 빠져 나오면서 나와 아버지가 있는 우리 가계를 덮쳤다. 순간이 었다. 나와 아버지 는 전차에 깔려 죽는 줄만 알고 납작 엎드렸다. 전차는 가계 집웅을 날려 버리고 전차 바퀴 사슬이 나의 눈앞에 까지 닦아와 정지 했다. 한 뼘 정도의 거리에서 전차의 굴렁쇠가 멈추었다. 나와 아버지는 꼭 껴안고 이제 죽는 구나 생각 하며 몸을 떨었다. 그런데 전차가 눈 앞에서 정지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지금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느님이 나와 아버지를 지켜 주신 것이라 믿었다.

얼마 후 전차의 뚜껑이 열리더니 인민군이 머리를 내 밀었다. 그리고 전차 위에 실린 벽돌을 발로 흘터 내고 있었다.

“동무 ! 쌍 간나 새끼들 한 놈도 없어 ! ”

인민군의 말 소리가 들렸다. 함경도 말씨였다. 전차 안에 있는 동료 병사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전차는 인천 부두가 방향인 신포동 쪽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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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의 굴러 가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다시 정막이 왔다. 무서웠다. 나는 온 몸을 가느지 못했다. 아버지는 더했다. 돌 부처 모양 꼼작 달삭 못 하셨다.

“ 아버지 !”

나는 아버지를 불렀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정신이 드시는지 나의 손을 꼭 잡으신다. 그렇게 한 두어 시간을 보냈을가, 새벽이 닦아 왔다. 아버지는 부셔진 문틈으로 밖을 내다 보았다. 새벽 거리는 싸아하고 짙은 안개에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도둑 고양이 모양 사방을 드리번 거리시더니 나의 손을 잽 사게 잡아 끌었다. 그리고 가계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왔다. 한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 빨리 가자. ”

나와 아버지는 달렸다. 죽음의 장소에서 탈출 하듯 박살 난 파출소며 부서진 가계를 뒤로 하고 달렸다. 집 쪽으로 뛰었다. 어떻게 달렸는지 모르게 집에 와서 문이 부서저라 두들겼다. 놀라며 문을 열어주는 어머니를 제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와 나는 마루에 누워 헐덕 거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시간이 지나니 좀 진정이 되었다.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사이 학교에서 통지가 왔다. 학교에 나오라고는 소집 통보였다. 나는 학교에 갔다. 학생들이 얼마 없었다. 순해 보이던 학교 선생님 여럿이 학교에 나와 내무서원인지 인민군인지 지시를 받고 있었다. 집에 와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했더니 전부터 빨갱이였었나 보다 하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말조심하라고 이루셨다 .그래서 북한 사투리를 숨겼다. 흑시나 나로 인해 월남한 가족으로 들통나면 어쩌나 하고 어린 생각에도 조심했다. 하여간 나는 북한에서 배웠던 “ 김일성 장군 ”의 노래며 인민군 군가를 다시 배웠다. 우리는 발을 번쩍 들어 올리는 인민군 제식 훌련도 받았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교육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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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들은 신기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루했다.

얼마 후 놀란 사실은 파출소에 붙잡혀 고역을 치른 학교 반 친구 누나가 민족 해방의 승리자로 영웅 칭호를 받고 앞장 서서 인민의 반동 분자들을 색출하며 다녔다. 경찰관 , 국군의 가족을 색출하고 나선 것이다. 소름이 끼첬다.

우리는 인민군 전차에 박살난 고무신 가계를 다시 수리하고 장사를 계속했다. 중앙 시장은 여전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상거래를 하고 있었다.

8월 달을 들어 서면서 공산 당원들은 바삐 움직였다. 공산 당원들은 마구잡이로 시민들을 노력동원에 끌고 나갔다. 낙동강 전선에 이상이 생겼는지 사람들을 잡아가고 의용군으로 잡아갔다.

아버지는 나이 때문인지 의용군은 면하고 노력동원으로 뽑혀 월미도 공사장에로 끌려 다녔다. 월미도를 요새화하기 위해 진지 구축 작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월미도에 포대를 세우는 진지작업인데 인천의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 되었다. 때로는 소 월미도에도 진지 작업을 했다. 인민군은 월미도를 요새화 했고 언젠가는 연합군과 일전을 하리라고 예측을 한 것 같았다.
8월이 다 지날 무렵 인민군은 발악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의용군을 뽑아 갔고, 노력 동원에 극성을 부렸다. 아버지는 핑계를 대고 노력동원에 빠졌다. 그리고 집 뒤 기차 뚝 아래에 방공호를 파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가족이 들어가 숨을 장소를 만들었다.

그 때에 삼촌이 시골에 숨어 있다 우리 집에 찾아 왔다. 한 다리에 붕대를 칭칭감고 지팡이를 집고 들어 왔다. 생 발바닥을 칼로 찔러 상처를 내고 환자로 위장한 것이다. 나는 놀랬지만 좋아 하는 삼촌이라 신이 났다. 삼촌의 말로는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 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였다. 얼마 후 유엔군의 대 반격이 있으리라고 귀뜸을 해 주었다. 하늘 높이 비행기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득거리며 날랐다. B 29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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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 했던 비행기는“ 쌕쌕” 이 젯트기인데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지 “씽”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면 비행기는 벌서 저멀리 날으고 있었다. 점점 비행기가 나타나는 횟수가 많았다. 인민군도 “ 쌕쌕”이가 나타나면 공포에 떨며 민가에 뛰어 들어가 숨거나 마차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중앙시장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 졌다. 하루는 “ 쌕쌕 ”이가 중앙시징을 한 바퀴 돌더니 갑자기 중앙시장의 수 많은 시민들을 향해 기총 소사를 하고, 네이판 폭탄을 투하 한 것이다. 다들 “ 쌕쌕 ”이를 좋아 하던 시민들이었는데 무슨 변고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시장에는 인민군도 없었고 전쟁물자도 없었다. 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사를 하고 있는 상인들에게 폭탄을 퍼 부었으니 숫한 사람들이 죽었다. 비행기가 떠난 후 나는 시장으로 달려가 보았다. 피가 넘처 흘렀다. 정말 처참 했다. 어느 누가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부터 나는 그렇게 좋아하던 “ 쌕쌕”이가 싫어 졌다. 전쟁은 어느 쪽이든 믿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없었다. 인민군은 공출이라고 해서 현물세를 받았는데 곡식을 몽당 빼앗아 갔다. 어머니는 가족의 연명을 위해 보리 죽을 끓으시느라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않이 었다. 보리 죽도 없었다. 고구마 줄거리에다 호박을 넣고 호박 죽을 끓으셨다. 그렇게 입에 풀칠을 하면서 하루를 살아만 했다. 나는 정말 고구마 줄거리에다 호박을 넣은 호박 죽이 싫었다. 그래서 호박죽을 슬적 버리다가 어머니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어느덧 가을의 한기가 스며 들었다. 가끔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만국공원으로 갔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 보시면서 의미 심장한 얼굴을 하시었다. 그런데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함정들이 인천 앞 바다에 빼곡이 들어 서 있었다. 그렇게 많은 함정을 나는 본적이 없다. 마치 바둑판에 바둑알이 잔득 깔려있는 것 처럼 함정들이 인천 앞 바다에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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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부터 아버지는 집 밖을 나가는 것을 금 했다. 우리 집은 점점 밖의 세상과 차단을 하면서 지냈다. 집을 비우고 철로 둑에 파 놓은 굴속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고무신 가계도 아에 문을 닫아 버렸다. 전쟁 막판에 지방 빨갱이들이 너무 무서웠다.

1950 년 9 월 15 일 새벽. 아버지의 예감이 들어 맞았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 되었다. 세계 대 전사에서 유례가 드문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인천 앞 바다는 상륙작전하기에는 좀 힘든 곳이다. 썰물 때 인천 앞바다 갯벌이 최고 3.2 KM 나 노출되어 합정이 상육 지점 까지 접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인천 항의 간만의 차는 평균7 m 에서 심 할 때는 10m의 어려운 조건이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성공적인 인천 상륙 작전 만큼 통쾌한 순간은 없었다.

연합군 비행대는 월미도 제방 위에 설치해 놓은 인민군 장갑차를 일시에 폭파 시켰다. 그리고 소 월미도와 월미도 전체를 융단 폭격을 시작했다. 건너편 인천항 포대에서 인민군의 응사가 있었으나 함포사격과 비행기의 공중 폭격으로 이내 저항이 사라 젔다.

깊은 밤에도 함포 사격은 계속 되었다. 인천시 전체를 융단 폭격을 하고 있었다. 바다 쪽에서 부터 시내 안 쪽으로 1m 간격으로 폭격해 들어 오고 있었다. 우리가 숨어 있는 방공호 가까이 함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 뚝 방공호 근처까지 함포가 터 졌다. 포탄 파편이 푸드득 푸드득 풍뎅이 소리를 내며 날아 다녔다. 방공호 입구에 막아 놓은 기차 쇠 바퀴에 파편이 부디 치는 쇳 소리가 쨍쨍하고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지혜로으 셨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것, 기차 바퀴로 방곻호 문 앞을 막은 것은 정말 잘 하신 것이다. 그 기차 바퀴가 우리 가족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방공호 속에서 이불 을 뒤집어 쓰고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어머니가 기도를 하고 나면 아버지가 하고 그렇게 함포가 터지는 가운데에서 기도 만을 했다. 그 함포 폭탄이 방공호 주변에 터지고 파편이 난무하고 있는데 우리 방공호 입구에 검은 물체가 닥아 와 섰다. 얼마나 급했던지 그 물체는 허락도 없이 우리 방공호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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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체는 다름 아닌 인민군이 었다. 인민군은 장총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월미도 진지에서 겨우 살아나 시내로 탈출한 모양이다. 서울방향으로 가자니 자연 기차 철로를 따라 가는 것이 정확하다고 판단을 해서 서울로 향하다 함포 사격 으로 더이상 갈 수가 없어 우리 방공호로 기어 들어 온 것이다. 우리는 긴장을 했다. 흑시나 우리 식구 모두 다 쏴 죽이고 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침착했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했다. 인민군의 손을 잡고 이불 속으로 끌어 들였다. 우리 식구와 합께 이불 속에 머리를 밖았다. 어머니는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는데도 함포 사격은 계속되었다.

“ 하느님 이 불상한 자식을 살려 주시고,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편안이 목적지 까지 인도해 주옵서소 아멘.” 어머니의 기도 속에 목적지는 인민군의 고향을 말하는 것이리라. 어머니는 간절히 빌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조용해 졌다. 함포 사격이 멈춘 것이다. 우리 가족은 머리에 쓴 이불을 걷어 올렸다. 방공 호에는 우리 6 식구 외에 인민군이 함께 있었다. 낯선 인민군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인민군은 어려 보였다. 17 살 정도의 누나 나이 또래였다.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인민군을 쓸어 안고 빨리 떠나라고 나직이 말을 했다. 어머니의 떠나라는 말은 고향의 부모한테 가라는 말인 듯 했다.

인민군은 아무 말 없이 방공호 밖으로 나 갔다. 아직도 밖은 캄캄한 밤이었다.

“ 잘 가시요. 조심 하고. ” 어머니가 먼저 말을 했다.

“ 잘 계시라요. 고맙스다레. ” 인민군은 철로를 따라 엄둠속으로 사라젔다.

우리 가족 모두가 허망하고 허탈한 마음이 었다. 방공호 속에서는 이불을 같이 들러 쓴 인민군의 생사에 마음이 아팠다. 살아 고향 부모에게 갈가 아니면 도중에 죽을가.

새벽 동이 텄다. 무섭고 두려웠던 어둠은 가시었다. 더 이상 함포 사격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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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서운 함포 사격에서 우리 가족은 살아 남았다. 아마도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이 응답을 해주신 것이다. 우리 식구는 방공호의 공포에서 벗어나 피난을 가기로 했다. 우리 식구는 각자 물건을 챙겨 가지고 집을 나섰다.

포화 속에 시내는 불타고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피난을 갔는데 바보 같이 우리 식구만 함포 사격속에서 살아 남았다.

우리는 주안 쪽 수봉산 절로 가기로 하고 발을 옮겼다. 얼만큼 갔을가, 송도 쪽에서 군대 행열이 인천 시내로 들어 오고 있었다.

“ 어느 쪽 군대야 .” 하고 아버지가 물었다.

“ 미군인데 .” 삼촌이 재 빨리 대답을 했다.

“ 그러면 다시 돌아 가야 겠네. ” 어머니가 오랜 만에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 오는데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 났는지 많은 사람들이 창고를 털고 있었다. 인민군이 소유했던 창고며, 빈 집을 털고 있었다. 비단과 광목을 들고 다니는 사람, 쌀을 포대로 지고 끙끙거리는 사람 시내는 무법 천지가 되었다.
나도 잽사게 창고로 달려 갔다. 무엇이나 집어 올려고 어머니가 말리는 것도 모른체 하고 집 근처 창고에 들어갔다. 창고에 들어 가니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이미 인민군이 다 가지고 간 빈 창고 였다. 그렇게 많던 물건들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래도 흑시나 하고 빈방을 이리저리 들러 보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소리 나는 쪽으로 살금 살금 가 보았다.

주위에 피 자국이 있고 피 묻은 옷가지가 흩어져 있었다. 나는 가만이 서서 귀를 귀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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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무 어떻게 하면 좋겠오 ?” 사람의 목소리가 나즉이 들렸다.

“ 군관동무, 나도 모르겠습니다. ” 울먹이는 소리였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함포 사격 때 방공호 속으로 들어온 인민군이 생각 났다. 나는 밖으로 튀어 나왔다. 마침 해병대 아저씨들이 길 양쪽으로 갈라 서서 행진하고 있었다. 나는 해병대 아저씨 앞으로 달려 갔다. 그리고 벽돌 집 안을 손으로 가리켰다.

해병대 아저씨는 너무도 빨리 알아 차렸다. 나의 손 끝을 보더니 몇 명의 해병을 데리고 벽돌 집 안으로 날렵하게 들어 갔다.

얼마 만인가 안에서 총소리가 “ 탕 탕 ” 울렸다.

나는 깜작 놀랐다. 인민군이 죽는구나 그런데 얼마 후 두명의 인민군이 두손을 높이 들고 나오고 있었다. 한 명은 장교 바지를 입고 또 한명은 군복을 아에 벗어 버리고 내의만 입고 있었다. 마음이 씁슬했다. 어제 저녁 방공호 속으로 살려고 들어온 인민군 이나 별 다름 없는 군인들이 었다.

이제 1950 .6.25 전쟁은 60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 때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그리워 진다. 내 나이 70이 넘었으니 그 때 사람들은 거지반 세상을 떠 났으리라.

그리고 6. 25 전쟁의 흔적은 하나하나 사리지고 그 때의 아픔을 망각하고 있는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전란 속에서 살아 남은 인생의 무상 함, 동족 상잔의 민족 비극이 이 땅에 다시는 일어 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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