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 저 멀리 있는 고향
6·25 60주년기념 수필 공모
‘그러지 않아도 빅원이 온다더니 드디어 올 것이 오는 가부다. 공교롭게도 남편 출장으로 나 혼자 있는데 어쩌나. 9·11이 터질 때에도 바로 쌍둥이 빌딩을 마주한 곳에서 나 혼자 있었더니만, 또.......’
어쩔 줄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누워 있노라니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조심조심 일어났다. 시간 있을 때 지진을 대비하여 중요한 물품들을 챙겨놔야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얼른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엄마 생일이라고 큰 아들이 제법 고심하며 골랐을 명품 가방에 내 딴에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서류부터 차곡차곡 넣었다. 여권, 은행 문서, 언젠가는 글을 쓴다며 글감을 정리해 놓은 내 가장 소중한 공책, 가족사진 몇장...문득 빛바랜 사진에 시선이 멈추었다.
몇 해 전, 한국에 다녀 온 친정 여동생이 낡은 사진첩을 뒤져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 몇장을 뽑아 나에게도 전달한 사진들이었다. 친정 부모님의 빛바랜 흑백 약혼 기념사진과 들러리를 셋이나 앞세운 당시로서는 꽤 근사했을 결혼사진, 학사모를 쓴 미남의 아버지, 세월이 흘러 모처럼 집 앞마당에서 3남매를 세워놓고 찍었지 싶은 가족사진, 지금의 내 두 아이보다 더 어려보이는 빨간 한복 차림의 내 옆에서 활짝 웃고 계시는 아버지, 훌쩍 커버려 교복 바지가 짧아진 우스꽝스런 차림의 오빠와 함께 서계신 아버지 등...
‘언제 찍었을까? 아버지와 이런 시간도 보냈었네!’
온통 어둠이 기세 등등이 버티고 있는 3월의 새벽, 지진의 두려움은 아랑곳없이 어느 새 나는 가진 것은 없을지라도 마냥 행복했던 아득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실향민 아버지
내 친정은 6·25 동란 당시 원산에서 LST를 타고 이남으로 내려오신 실향민(失鄕民) 집안이다. 아버지는 4형제 중 셋째로 아래의 넷째 동생은 전쟁때 전사하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난통에 형님들과 헤어져 아버지 홀로 이남에 내려와 전전긍긍하다가 군대에 자원 입대하셨다. 전쟁에 나가는 일은 무서웠으나 적어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약골인 아버지는 그만 늑막염을 앓게 되었다. 누구 한 사람 아는 이 없는 이남의 어느 초라한 곳-내 기억으로는 거제도 수용소라고 알고 있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간호사가 여기 저기 수소문한 끝에 기적처럼 두 형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필시 같은 곳에 있었는데 서로 몰랐으리라. 그 후, 두 형님들이 버팀목이 되어주며,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는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여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그 어렵던 시절 대학과정도 마치셨다.
땡전 한 푼 없는 피난민 신세에 그 어려운 삶을 어떻게 살아내셨는지, 아버지의 고생담을 잘 들어 두었어야 했는데 너무 어렸던 탓에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어 안타깝다. 어마어마하게 큰 배가 온통 피난민으로 바글바글 댔다는 이야기, 사방에서 총탄이 날라 다녔고, 하늘에서는 폭탄이 떨어졌으며, 죽어 나뒹구는 시체들을 넘어 다녔고, 하얀 피부에 키가 이만큼이나 큰 러시아 군, 끝도 없이 밀려오던 중공군 등.. 6·25때가 되면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는 다리 끊긴 한강의 모습 따위의 당시 사진과 더불어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전쟁의 무서움에 여린 가슴은 콩콩 방망이질 쳤다.
한편 어머니는 당신의 아버지와 내려오셨다가 영영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그만 이남에 살며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다. 교회에서 특창하는 엄마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반해 청혼하셨다는 아버지의 로맨스를 종종 듣곤 했었다.
외할아버지는 이북에서 교회를 많이 개척하며 신실히 믿음을 지키는 분이셨다고 한다. 집안의 장자인 오빠가 태어날 때 당시 최자실 권사가 받았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아마 외할아버지는 순복음교회에 다니신 것 같다. 어린 시절 엄마 손 잡고 교회에 갔었고 가끔 교회에서 심방 오신 것도 기억난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바빠 부모님은 점차 교회와 멀어졌다가 엄마의 유일한 친척의 전도로 후일 다시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실향민 삼형제
아버지 삼 형제가 각기 가정을 꾸려 외롭고도 고단한 실향민의 삶을 엮어갔을 우리들의 어린 시절, 설날과 추석에는 어김없이 큰 아버지 댁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폭설이 내려 버스가 끊겨 버린 어느 해 설날에는 한참을 걸어 큰길까지 가서 가까스로 버스를 타고 큰댁에 간 기억도 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눈이 한 자나 쌓인 시골 길을 걸어가면서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눈길에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아버지 손을 꼭 잡고 큰댁에 가던 장면은 어느 영화 못지않은 아름다운 흑백의 추억이다.
“어서 오나라, 우리 강아지들!”
변함없이 반겨주시던 큰 어머니의 함경도 사투리는 언제 들어도 푸근했다. 큰 아버지 두 분은 이제나 저제나 고향에 갈 날을 기다리다가 결국 나중에 가정을 꾸리는 바람에 사촌들은 나보다 어렸다. 올망졸망 어린 것들은 모처럼 대하는 떡국이나 잡채 등 평소에는 맛보지 못하는 푸짐한 음식에 배가 남산만 해졌다. 게다가 평소에는 보지도 못하던 과자나 사탕 따위를 한 보따리씩 받고는 마냥 신났었다. 큰어머니가 차려 주시는 음식은 얼마나 맛이 좋았는지....
어린 것들 주머니에 세배 돈이 두툼해짐에 따라 아버지 삼형제의 형제애는 더욱 돈독해지며 실향의 아픔은 조금씩이나마 옅어졌다. 비록 온 가족이 함께 내려오지는 못했으나 삼형제라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가까이 지낼 수 있음에 세 아버지는 서로 위로가 되었으리라. 졸지에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 물설고 낯설은 객지에서 살게 된 부모세대의 실향(失鄕)의 한(限)을 2세인 우리는 전혀 가늠할 수 없을지니.......
실향민 자녀 교육
자식들만큼은 잘 살게 해주고 싶은 아버지는 워낙 부지런한 성격이셨다. 설날과 추석 딱 이틀을 제외하고는 일년 열두 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게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고 앞마당을 싸리비로 쓸며 하루를 시작하셨다. 또 상당히 엄하여 1년에 한 두 차례 호되게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럴 때면 무척이나 내성적인 나는 며칠이고 엄마, 아버지에게 말도 못 부쳤다.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새삼 가슴이 아리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암울하기만 했던 60년대,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한 투자를 하며 예술적인 소양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셨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고전무용을 배웠고 겨울방학때면 어김없이 스케이트를 탔다. 국문을 깨우치자 아버지는 어린 남매와 함께 시조가 적힌 카드놀이를 하며 은연중에 문학공부를 시키셨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후일, 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알고 있는 시조가 나오면 그리도 기분이 으쓱했었다.
부모 세대 실향의 한을 2세인 우리는 가늠할 수 없어
지도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장식품이자 교육자료였다
떠나온 고향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을까? 여러 번 이사를 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안방 혹 마루 벽에 커다란 지도를 붙여 놓으셨다.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딱히 집안을 장식할 멎진 액자 하나 걸어 놓을 여유가 없던 가난한 시절, 지도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장식품이자 더할 나위없는 교육 자료였다. 아버지 고향은 이쪽이고 휴전선은 어떻게 그어졌고,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경기도 여기고....... 이곳은 영국, 저곳은 미국, 여기는 소련....... 각 나라의 수도는 어디고....... 그 때부터 어린 딸은 온 세계를 마음에 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번, 바람의 딸 한비야 씨의 강연에 참석하였다. 워낙 유명 인사라 한 번 꼭 만나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두 장씩만 준다는 입장권을 떼를 쓰다시피 네 장을 받아, 모처럼 집에 온 둘째와 그 친구까지 합세하여 네 사람이 함께 강연을 들었다. 강사의 첫 이야기를 들으면서 갑자기 소리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린 시절, 그녀의 집에는 항상 지도가 붙었다고!
‘내 어린 시절, 우리 아버지도 지도를 붙여 놓았어요!! 또 나도 아이들 보라고 집에다 지도를 붙여 놓는데요.’
한비야 씨네 집안도 이북 출신이었을까? 한 번 물어볼 걸.......
배운 대로 한다더니, 세월이 흘러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 역시 가는 곳마다 지도를 붙인다. 한국 지도, 세계 지도에 한 장 더하여 미국 지도까지.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액자나 멋들어진 장식품도 많다지만 지도만큼 실속 있고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마누라의 드센 외침에 남편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단다.
“이보시요, 남편. 무엇이 문제라요? 값이 비싸기를 해, 우리처럼 자주 이사하는 집에 무겁기를 해, 아니면 부피가 많이 나가기를 해, 왜 그런다요. 아이들 지리 공부도 할 수 있지,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 수 있지. 보라요. 저 유명한 한비야 집에도 지도가 붙어 있지 않았다요, 참말로. 우리 아버지는 안 그러셨는데, 어째 저리 다를까이?”
강연에 다녀온 뒤로 내 목소리가 한층 더 놓아졌다.
콧구멍만한 잡화 가게를 차려 식구들 먹이시느라 항상 누군가는 지키고 있어야 했다. 엄마와 오붓한 시간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영화 구경을 가시기도 했다. 그럴 때면 집에 빨리 가자고 떼쓰던 기억도 있다. 외로운 타향살이나마 나름대로의 감성을 잃지 않으신 아버지셨다.
기독교 계통의 어느 학교가 좋다는 이야기에, 아버지는 어느 하루 온 종일 그 학교에 가서 지켜볼 정도로 세심하게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비록 당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을지라도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오빠와 나는 그 초등학교의 3학년, 2학년으로 전학하며 서서히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교회에서 반주나 했으면 좋겠다는 부모님의 소원에 따라 당시로서는 귀했던 피아노도 배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1남 2녀, 얼마나 잘 키우고 싶으셨을까? 아, 내 아버지!
외로운 아버지
어린 시절 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아버지의 모습이다.
1960년대 말 초등학교 5학년 무렵. 텔레비전에서 한국을 방문한 재일동포들을 환영하는 프로그램을 실황 방송한 적이 있었다. 가수들이 방문단을 위하여 노래를 부르는 시간 설움에 겨워 흐느끼는 재일동포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식구들이 모여 함께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아버지도 그만 감정이 복받쳐 엉엉 우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으면 아버지 같은 어른이 저렇게 우실까!'
그 때 흘러나오던 국민 가수 고복수 선생의 "두만강 깊은 물에"로 시작되는 노래나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등의 가요는 어린 내 마음에도 너무 슬펐다.
'아버지의 고향이 함경도 어디라는데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그 후 '이북'이라는 곳은 내 마음 한 구석에 소중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마 중학생 정도 되었을 때다. 이북에서부터 아는 사이였는지 아니면 대학 친구였는지 '은행 아저씨'라 부르는 아버지의 친구가 있었다. 어느 은행인지 높은 자리에 계셨기에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부유하게 사는 집안이었다. 언젠가 우리 삼남매만한 자녀들을 앞세우고 초라한 시골 우리 집에 오신 적이 있었다. 선물이라며 주신 파운드케이크의 달콤함이라니!
살기에 바빠 일년에 한두 번 만나기 어려우나 아버지에게 '은행 아저씨'는 마음으로 의지하며 지내던 유일한 친구였다. 서울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을 소중한 사람. 한 번은 추석날 큰댁에 다녀오는 길 오래 만에 '은행 아저씨'의 집을 찾았다. 물어물어 찾아갔더니만 아니 이게 무슨 날 벼락이람! 가정부가 나와 하는 말이 주인아저씨는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단다. 식구들은 성묘 가셨는데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 기다리시라고. 망연자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친구의 유족들을 대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황망히 발걸음을 옮기셨다. 간신히 집에 오셔서 아버지는 나에게 찬송가를 쳐달라고 하셨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의 노래를 반주하던 일이. 그리도 흐느끼며 딸의 반주에 맞춰 찬송을 부르시던 아버지.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내 주께 가는 길 험하여도…"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십자가로 가까이…"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던 어린 딸도 피아노를 치며 아버지 따라 마냥 울었다. 이튿날 새벽 변함없이 가게 문을 여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리도 쓸쓸했다.
매사에 성실하게 본을 보인 아버지는 50을 두 달 앞둔 채 짧고 굵은 삶을 마치셨다. 담배는 전혀 입에 대지도 않으신 분이 폐기종이라는 병으로 그만 인생을 하직하신 것이다. 숨을 거두시던 마지막 순간의 평온한 모습은 언제까지라도 내 마음 속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큰 딸래미가 효녀라고 칭찬하셨다는데….
애환의 한민족
미국에 살면서 그 옛날 어린 시절에 들었던 푸근한 이북 말씨를 종종 듣는다. 이남으로 피난 온 실향민 중에 많은 분들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오신 연유다. 특별히 한국 교포가 밀집해 사는 나성에는 이북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한 두 마디에 이북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찌 그리 반갑던지. 이왕 고향 떠난 사람들 한 번 더 떠난다 하여 어려울 것 있었으랴?
벌써 올해로 6.25 동란 발발 60 주년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6.25 동란을 잊혀 진 전쟁이라고 한다는데 한국 사람으로 어찌 우리 잊으랴!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3월 한국의 국립극장에서는 '아 나의 조국!'이라는 특별한 연극이 상연 되었다고 한다. 6.25 동란 발발 1년 후인 1951년에 북한에 끌려갔다가 수차례 파란만장 죽을 고비를 넘기고 43년 만인 1994년에 무사히 귀환한 조창호(1930-1994) 소위의 삶을 기리는 무대였다. 천신만고 끝에 이남으로 넘어온 조창호 소위가 국군 병원에서 육군 장성에게 귀환 신고를 하는 장면 등 감동적인 연극이었단다. 연극이 끝난 후 조창호 소위 역할을 한 배우가 살아 있는 전설 백선엽 장군에게 귀환 신고를 하며 모인 사람들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고.
그러나 관중의 대부분이 노인들로 이루어져 있어 연극의 실제 목적을 제대로 성취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고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과거 역사에 너무 무지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만 가는 요즈음이다.
또한 6.25 동란 발발 60 주년을 기념하며 한국의 고석만 영화감독은 한국인 최초로 워싱턴 주 상원 의원이 된 신호범 박사의 일대기를 만든다고 한다. 다큐멘타리와 영화 50부작 드라마를 각각 '기적을 이룬 꿈' '산탄 총알(Bug Shot)' '그날이 오면' 등의 제목으로 올해 안에 완성하려고 준비 중에 있단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신호범 이라는 인물뿐만 아니라 6.25 동란이라는 굵직한 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좀 더 정확한 면을 알게 될 것이라고.
6·25동란을 겪은 많은 분들이 작고하셨거나 연로한 상태
60주년이 되는 6월, 아버지날이라 더욱 생각나는 아버지
사실 한국의 식자층에서는 6.25 동란에 관하여 한국인이 만든 제반 작품이 별로 없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6.25 동란이 세계 역사의 중요한 획을 그은 엄청난 전쟁 중 하나인 만큼 거기에 필적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 대작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몇 해 전인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이야기를 다룬 '요덕 스토리'라는 뮤지컬이 미국의 여러 곳에서 상연되었으나 그것도 다분히 탈북자들이 제작한 것으로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한다.
비근한 예로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또 최근에 나온 발키리 등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의 잔학성을 폭로하는 소설이나 영화는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 학살 추모관을 세워놓고 이러저러한 행사를 통하여 자신들의 과거를 세상에 알리며 후손들에게 산교육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이민 역사 100년을 넘긴 북미주의 한국인 가운데서도 한국동란에 관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작품들이 나올 때가 되었다. 내년에 LA 매스터 코랄과 LA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한국의 이산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음악으로 엮어 월트 디즈니 음악당에서 올린다고 한다.
한국인 여류 바이올리니스트가 출연할 예정이며 현재 한국에서 작곡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작곡가 우효원 선생의 곡도 포함시켰다고.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 무용 문학 등 모든 면에서 이러한 일이 진행되어야 하리라.
현재 6.25 동란을 겪은 많은 분들이 작고하셨거나 연로한 상태다. 각 가정에서나 각 교회에서 또는 정책적으로 그런 분들의 회고담을 잘 정리하여 후세대에게 제대로 알려야 할 것이다. 친정아버지의 행적을 정확히 보존하지 못하여 자식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못난 딸의 자책의 말이다.
잃어버린 아버지의 글
삼 년 전 성탄절 오랜만에 엄마를 위시하여 친정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오라버니를 통하여 알게 된 새로운 사실 하나.
젊은 시절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책을 낼 것이라며 당신의 행적을 기록한 두툼한 원고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셨다고 한다. 살기에 급급하여 또한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하는 통에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더니 결국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사라져버렸다며 오라버니는 매우 애통해 했다. 그 때는 너무 어려 그 두툼한 보따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다고 못내 아쉬워하는 오라버니는 자신도 언젠가는 글을 쓸 것이라고 슬쩍 속내를 비쳤다.
'정말 그렀네. 언젠가는 글을 쓸 것이라며 흔들거리는 아파트 속에서도 글감이 담긴 공책부터 챙기는 변변치 못한 동생이나 두 아들에게 수시로 장문의 긴한 편지를 써 보내는 오라버니나 그 아버지에 그 아들딸이었구나!'
우리 집안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언제부터인지 내 속에는 글을 쓰고 싶다는 아니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동안의 의문이 스르르 풀리던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던 전율!
'아 아버지의 피가 내 속에서 흐르고 있었구나! 아버지의 못 다한 꿈을 이 부족한 딸이 이뤄야 할 텐데. 이제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글을 써 볼까?'
어느새 아버지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났다. 이미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긴 못난 딸은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아버지의 삶을 따라 가겠노라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후일 아버지를 만나 아버지 떠난 후의 지난 세월을 도란도란 이야기 할 것이다.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딸로 어떠한 삶을 살아 냈는지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냥 흐뭇해하시겠지. 6.25 동란 발발 60주년이 되는 6월 또한 아버지날이라고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는 달이기에 새삼 더 그립고 보고픈 아버지다.
한국 역사의 험한 풍상을 오로지 몸으로 막아내며 그 거센 풍랑 까닭에 오늘 이 시간 바로 이 자리까지 견뎌 오신 장하고 장한 실향 1세대 모든 아버지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그 분들이 고향을 밟을 수 있는 날이 속히 돌아왔으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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