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상] 내가 들은 6·25 이야기 '할머니, 그리고 한 미군 병사'
6·25 60주년기념 수필 공모
우연히 한 한국전 참전 미군 병사를 알게 되어 그의 체험을 듣고 한 한국 할머니의 처연한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저렸다.
미군 병사의 이름은 '월터 벤튼'. 계급은 상사로 당시 압록강을 향하여 북진하던 미 육군 3사단 소속이었다. 그의 부대는 북진중 대거 중공군을 만나 후퇴하게 되었고 결국 흥남에서 비운의 철수작적을 하기에 이르른다. 그가 말하는 이 이야기는 배가 떠나기전 1시간쯤 전에 벌어졌던 일이다.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영하 20도 우리 부대는 모진 눈보라가 치는 흥남 부둣가에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수송선의 승선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모닥불가에 서있던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한 늙은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가까이와서 불을 쪼이라고 손짓을 했다. 처음에는 무척 망설이던 그 할머니는 마침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모닥불을 위로 펴서 뻗은 할머니의 손은 평생동안 험한 일만 한 탓인지 울퉁불퉁하고 굵은 매듭이 생겨 있었다. 이렇게 추운날 장갑도 없이 어떻게 동상에 걸리지 않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대형 물통을 밀어주면서 할머니를 앉게한 다음 무척 시장해보이는 할머니를 위해 깡통 통조림 몇개를 뜯었다.
이때 쯤 부두와 해안가에서는 미처 배에다 실을 수 없게된 식량 장비등 군수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이를 폭파시키기 위하여 야전 공병대들이 숨가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배운 짧은 한국말 또 옆의 전우들까지 합세해 손짓 발짓으로 알아낸 바에 의하면 할머니의 나이는 93살이었고 지난 며칠동안 먼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가족들은 죽거나 흩어졌고 함께 오던 몇몇 친구들과 같은 마을 사람들도 모두 폭격이나 전투상황으로 서로 뿔뿔히 헤어졌다고 한다.
피난 다니는데 너무 지쳐서 그냥 여기 있고 싶다고 했고 또…
그 할머니를 억지로 끌고서라도 배에 태웠어야 했던게 아닌가
통조림을 모닥불에 데우고 있는 사이 항구에 정박해서 피난민과 병력 보급품 탄약 등을 싣고 있던 한 배에서는 스피커를 통해 화이트 크리스마스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지난 1달 반의 그 끔찍한 전투기간은 내가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고 상상치도 못했던 바로 지옥의 시간들이었다. 미국에서 항상 듣던 지상의 평화와 인간의 사랑을 노래한 이 음악이 이 순간에 들으니 아주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통조림이 뜨거워진 다음 할머니에게 드시라고 권했다. 이윽고 배에 오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할머니에게 함께 가자고 몸짓으로 알렸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조금 있으면 폭파장치로 인하여 이 일대가 모두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려고 동료들과 함께 몸짓 발짓으로 애썼으나 할머니는 이제 피난 다니는데 너무 지쳐서 그냥 여기 있고 싶다고 했고 또 여기 있어야 자식들과 손주들도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역시 손짓 발짓으로 표현했다.
배위에서는 동료들이 빨리 올라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배에 올랐고 곧 상갑판으로 올라가며 뒤돌아 보니 할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처여한 모습이었으나 그 표정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배나 떠나려고 후진하고 있을때 통조림을 먹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폭발은 배가 바다쪽으로 1Km쯤 나아갔을까 할때 일어났다. 공장의 굴뚝도 부두도 군수품도 전투장비와 포탄도 모든 것이 순식간에 날아 올라가는 처절한 폭발이었다. 연기가 흩어졌을때 남은 거라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드디어 소원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이상 아무데도 그녀가 피난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평안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북한 땅을 벗어나 미국 배위에서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날 우리는 트루먼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흥남철수를 알리는 방송을 들었다.
배위에서 부산까지의 3일간을 안전하게 보냈고 그 이후부터는 다시 매일매일 전투로 날을 지새웠지만 어쨌든 그날은 내가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감사히 여기며 그리고 그 늙은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크리스마스로 내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내가 그 할머니를 억지로 끌고서라도 배에 태웠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나를 괴롭히고 있다."
〈끝〉
■심사평, 어휘·문법보다 내용의 공감 여부 살펴
6.25 60주년을 맞아 실시한 이번 수필 공모전에는 총 53편이 응모됐다. 응모자들은 90대에 가까운 노년층에서 초등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중에 4편의 영문 작품도 있었다.
6.25 수필공모전이라서 그랬는지 다른 공모전과는 달리 노년층의 참여도가 높았다. 컴퓨터 시대 답지 않게 육필로 쓴 글 속에는 60년 세월에도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수필의 주제는 6.25전쟁의 참혹성과 공산집단의 비윤리성으로 고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노년층 응모자의 경우는 실제로 경험한 사실을 글로 표현했고 젊은층에서는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들은 6.25의 참상을 기술했다.
작품의 상당수가 북한 공산집단에 대한 울분과 성토 비극적인 전쟁으로 인한 고통 한국전 당시 군에 근무할 때의 경험담 등이었고 일부는 대북관계 한미동맹 천안함 사태 등에 대한 주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번 심사는 본사 논설위원들이 맡아주었는데 6.25 참상에 대한 일반적인 고발은 그동안 많이 알려져 왔던 만큼 이번엔 개인의 경험과 느낌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응모자들이 그들만의 특수한 상황에서 경험한 이산의 고통과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를 어떻게 자신만의 글로 표현했는가를 살폈다. 응모작품 중 상당수는 자신의 경험이 아닌 6.25전쟁에 대한 일반론을 기술한 경우도 많았는데 이들 작품들은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얻지 못했다.
응모자의 상당수가 노년층이었음을 감안하여 심사규정에서 문장력이나 어휘 문법 등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노년층 응모자의 경우 어법이 어색하고 맞춤법 등이 일부 틀렸어도 큰 감점 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글의 내용이 얼마만큼 6.25의 비극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심사위원들에게 공감을 주었는가에 따라 순위를 결정했다.
최우수상 1명을 비롯해 우수상 3명 장려상 3명을 선정했는데 여느 공모전과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들의 주관적 판단이 작용되기 때문에 부문별 수상작들의 우열 차이는 크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영문으로 작성한 응모작 중 2편은 자라나는 2세들의 조국관 정체성 등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마지막으로 아쉬웠던 것은 이번 수필공모전의 응모 형식이나 작품의 분량 등에 대한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지 않아 수필 분량을 크게 넘은 작품들이 많았고 논문형식을 취한 작품을 있었다는 점이다.
올해 처음 실시된 6.25 수필공모전은 노년과 어린이 등 세대를 아우르는 응모자들이 참가해 6.25전쟁을 새롭게 조명하고 확실한 국가관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 의미있는 행사였다. 앞으로 한국정부가 재외동포사회에서 이같은 행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해 1세와 2세들이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완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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