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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내가 들은 6·25 이야기 '고무신'

6·25 60주년기념 수필 공모

엄마는 언제나 한복을 입고 계셨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 속에서도 엄마는 사시 사철 긴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솜 넣은 버선에 고무신을 신은 모습 뿐이다. 더운 여름날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발 끝까지 내려오는 치마 자락을 손으로 잡아 허리끈으로 질끈 동여 매고 장 바구니를 들고 대문을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은 동네 사진관의 흑백 사진처럼 아직도 선명하다.

태어나고 자란 서울의 돈암동이 내 세계의 전부 일때 엄마가 나만 사립초등학교에 보냈다. 당시의 '성신 사대부국'은 근처의 은석과 함께 돈 많고 '빽'좋은 집 아이들이 많았다.

학교 행사나 수업 참관일 때면 학부형들이 오는데 다들 양장에 하이힐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언제나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엄마가 은근히 부끄러웠다.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편인지라 특별히 부모님 뜻을 어긴 적이 없었지만 엄마의 고무신은 싫었다. 엄마는 집에서도 늘 솜버선을 신은 채였다. 엄마의 맨 발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 형제들 넷을 키우고 살림하며 엄마는 늘 명랑하고 분주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이었나보다. 몹시 더웠는데도 목이 따끔거리고 한기가 들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말도 못하고 앉아있는 데 담임 선생님이 조퇴를 명령했다. 뜨거운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어떻게 걸었는 지 모른다. 열린 우리 집대문을 보니 반가와서 울음이 나왔다.



1.

한 여름의 집 안은 찜통처럼 더웠는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아직 학교도 안 들어 간 어린 두 동생도 보이지 않았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벌컥 설움이 복받히려는 데 어디서 가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마루로 조용히 올라갔다. 몇 발자욱을 옮기다 열어 놓은 건넌방에서 엄마의 버선 벗은 두 발을 보았다.

엄마의 두 발은 발가락이 하나도 없이 뭉툭하고 작았다. 발 등과 옆에는 칼자국 같은 흉터가 크게 나 있고 주변은 굳은 살이 허옇게 덮고있었다. 엄마는 대야에 물을 떠다 발을 담가 불려서 면도칼로 굳은 살을 깍아 내고 있었다. 그 일에 집중하느라 엄마는 내 기척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아차렸다.

나에게 엄마의 처참한 두 발은 무섭고 충격이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입술만 앙 물고있었나보다. 엄마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일 주일쯤 여름 몸살을 심하게 알았고 그 날 이후로 다시는 엄마 발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다. 엄마는 발가락이 다 잘려나가 작아진 발을 버선 앞 뒤로 솜을 뭉쳐 넣어 적당한 크기로 만들고 거기에 맞춰서 고무신을 신고 다닌 것이다. 대중 목욕탕에 목욕하러 갈 때 왜 항상 외할머니나 이모하고 같이 갔는 지도 알 것 같았다. 열 살짜리 마음에도 엄마의 발은 건드려서는 안될 상처이고 끔찍한 비극의 잔재로 남게되었다.

2.

육이오 사변이 터진 1950년 엄마는 여고를 막 졸업한 꿈 많은 열 아홉이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독립적인 칠남매의 맏이라 아래로 동생들을 돌보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려는 소원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전남 고창에서 부유했던 외가는 주변에 친척들도 많아 유복한 일가를 이루었고 인심이 후하고 부지런한 외할머니는 어려운 이웃들을 늘 챙기고 도우셨다. 그러나 전쟁은 평화롭던 마을을 지옥으로 바꾸었다.

순하고 착한 마을 사람들은 인민군이 들어오자 그들의 꼭둑각시가 되어 가진 자들을 반동으로 몰아세웠다. 외가의 재산은 다 빼았겼고 가까운 친척들이 인민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처단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집안의 소작농 아저씨의 도움으로 그 집에 몸을 숨겼다. 대신 가장이 없어진 후 외할머니와 남은 식구들은 끔찍한 댓가를 치루어야했다. 장녀로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지켜내느라 겨우 스물 안팎의 엄마가 당했을 고난은 상상할 수도 없다.

엄마의 여섯 동생들 중에서 가장 엄마를 따르고 총명했던 바로 밑의 남동생이 장남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대신해 죽창에 찔려 잔인하게 죽어갔다. 엄마는 혼절한 외할머니 대신 사랑하는 동생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피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고 나중에 시신까지 수습해서 뒷 산에 묻었다.

"마치 온 세상이 피에 굶주린 아귀들로 가득 한 것 같았지. 죽창을 제일 먼저 찌른 놈이 나랑 젖을 같이 먹고 자란 유모의 아들이더라. 내 쌍둥이 형제 같은 그 놈이었어."

내가 고등학교때 엄마는 그 시절의 얘기를 처음으로 들려주었다.

3.

나는 그 때까지도 엄마네 형제들(외삼촌과 이모들)이 모두 일곱인 줄로 알고있었다.엄마에게는 가슴에 묻은 채 죽어도 잊지 못하는 생각만 해도 심장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픔인 또 한명의 동생이 있었던거다.

국군이 마을을 접수하고 또 한 바탕의 피비린내 나는 보복이 시작되었다. 인민군때 붉은 완장차고 압잡이노릇을 했던 자들이 이 번에는 거꾸로 숙청 대상이었다. 형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선량한 마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죽이는 피비린내의 연속….

몹시 추운 겨울에 엄마네 식구들은 피난 길에 올랐다. 가재도구도 겨우 챙겼지만 혹한에 어린 동생들 돌보느라 엄마는 몹시 힘들었다.

특히나 늦게 태어난 막내가 아픈 바람에 외할머니는 막내에게 묶여있고 나머지 다섯 동생들은 고스란히 엄마 책임이었다. 엄마는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유난히 잘 참는 성격때문에 자기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몰랐다. 피난 중에 엄마의 두 발이 동상에 걸렸다. 검푸르게 변한 두 발은 감각이 없고 걸을 수가 없었다. 스무 살의엄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창을 제일 먼저 찌른 놈이…유모의 아들이더라."
잘려나간 발가락과 함께 꿈과 미래를 접고 생업전선에…
엄마대신 태어났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올수 있었을까


국군의 한 젊은 군의관이 피난민 대열에서 낙오한 엄마를 발견해 이동중인 천막 병동으로 옮겨 수술을 했다. 다행히 발의 본체는 건졌지만 열 개의 발가락은 다 잘려나갔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엄마는 잘려나간 발가락과 함께 꿈과 여자로서의 미래를 접고 솜넣은 버선에 고무신으로 무장을 하고 남은 식구들을 위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읍내에 미장원을 개업해서 열심히 파마를 말고 고데기를 돌렸다. 밑의 여동생을 시집보내고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고 작은 집도 부모님께 사 드렸다. 스물 아홉에 우리 아버지를 만났는 데 아버지가 청혼을 하자 자기는 발 병신이라 결혼을 할수없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포기하지 않자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 흉칙스런 발을 보여주었다.

서른 넷 노총각이던 아버지는 두 손으로 엄마의 발을 감싸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두 발이 되어 주겠소."

4.

엄마는 최근까지도 주로 한복을 입으셨다. 올해 여든 이신 엄마는 60년을 솜버선과 고무신을 신고 사신다. 평생 대중 목욕탕을 못 가신 엄마를 위해 작년에 한국에 나가면서 수중용 고무 덧신을 사갔다. 미국 할머니들이 물 속 운동을 하면서 신는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었는데 엄마를 꼬셔 찜질방에 모시고 갔다. 처음에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주저하는 모습이었는데 탕 속에 몸을 담그고는 아주 좋아하셨다.푸른 고무 덧신을 신은 엄마의 발은 초등학생처럼 작아서 나이 든 할머니의 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작은 두 발이 애처로워 눈물이 났다. 5년 전 아버지를 먼저 보내신 후 엄마는 말 수도 적어지고 외출도 잘 안해서 함께 사는 동생을 걱정시키신다.

해 마다 6월이 되어 달력에서 25란 숫자를 보면 엄마가 온 몸으로 치뤄 낸 전쟁을 생각하고는 했다. 내가 그 시대에 엄마 대신 태어났다면 온전한 몸과 정신으로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엄마가 마치 나를 대신해 그 끔찍하고 징글징글한 전쟁을 몸 던져 받아낸 것 같다. 나는 조국 민주주의 숭고한 희생 혈맹 같은 거창하고 사전적인 단어보다 열 아홉의 우리들의 딸보다 더 어리고 순진했던 내 엄마가 겪은 전쟁이 더 처절하고 무섭다. 내가 사는 동안은 들은 얘기라도 기억하겠지만 엄마 세대들이 떠나고 우리마저 가고 나면 우리 아이들이 과연 이 전쟁을 알기나 할까. 나에게 엄마의고무신은 육이오의 비극과 영원히 아물지 않고 벌어져서 건드릴 때마다 아픈 생살의 찢김이다.

〈끝〉

■대회개요, 53편 응모작 중 7개 작품 선정해

중앙일보ㆍ중앙방송이 6ㆍ25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마련한 이번 수필 공모전은 잊혀지고 있는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의 현실을 되새기고 2세들에게 역사로 이어가는데 기여하기 위함이었다. 지난 6월 1일부터 18일까지 응모기간 중 총 53명이 응모했으며 본사 논설위원들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 최우수상 우수상 장려상 등 모두 7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최우수상은 어머니의 19세 때 얘기를 진솔하게 쓴 김성민씨(50ㆍ시카고 거주)의 '내가 들은 6ㆍ25이야기- 고무신'이 선정됐고 우수상은 김태성씨의 'The Memories in Youngsan'과 신금석씨의 '내가 겪은 6ㆍ25전쟁과 천안함' 김명순 씨의 '저 멀리 있는 고향'이 뽑혔다. 또 장려상은 '할머니 그리고 한 미군병사'를 쓴 나영욱씨 'The importance of the Alliance between South Korea & USA'를 쓴 송해수씨 '아 그날이여!'의 김일홍 씨가 각각 영예를 차지했다.

이번 공모전에 당선된 수필 작품중 3편을 지면에 소개한다.

게재되지 못한 다른 작품은 미주중앙일보 인터넷 신문인 코리아데일리닷컴(koreadaily.com)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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