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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풀타임' 화가의 고백

이수임/화가·브루클린

"아줌마, 나 여기까지 다시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오지 못하는 줄 알았어요.”

친구의 어린아이가 나에게만 비밀로 들려주듯 내 뱉는 소리에 쇠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몸이 굳어졌다.

한 친구가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키우기가 어려워 갓난 아이를 한국으로 보냈다. 몇 년 후 자리가 잡히자 다시 데려왔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공원에서 놀다가 재미가 없는지 내 옆에 앉더니 한숨을 내쉬며 들려준 말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입에서 세파에 시달린 어른들이 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나는 아무런 위로의 말도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1975년 LA로 이민 와서 식당에서 주방 헬퍼와 페인트칠, 그리고 신문사 광고부에서도 일했다. 뉴욕에 와서는 학교에 다니며 야채가게, 옷가게, 가발 도매상에서 일하며 학교를 마쳤다.

결혼 후엔 행상, 옷가게, 목수일 그리고 신발가게에서도 일했다. 마지막으로는 후배가 하는 램프 가게에서 칼라링을 했다.

램프 가게에선 처음에는 일주일에 닷새를 일했다. 그러다 나흘로 줄었다. 작심한 마약 중독자가 약을 조금씩 줄여가듯 하루하루 줄이다가 결국 하루까지 됐고, 마침내 일을 그만두었다. 십여 년 전부터 남편은 ‘풀타임 화가’다.

몇 년을 후배 가게에서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일을 줄일 때마다 나는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아이들은 커가는데 하루씩 일을 줄이니 어찌 살란 말인가. 다행히 줄여진 시간만큼 그림에 전력하니 그림이 조금 팔려 일하지 않아서 벌지 못한 것을 매울 수 있었다.

남편이 일을 줄여 어려울 때 마다 나는 직장을 알아보려고 신문을 뒤적였다. “이렇게 밖에 나가 일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버텨야만 우리 둘 다 전업 작가가 될 수 있어” 남편은 신문을 뒤지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이제 우리는 둘 다 ‘풀타임 화가’다. 이 사실이 꿈인가? 현실인가? 혹시나 가난의 그림자가 다시 우리를 덮치는 게 아닐까? 하며 불안하다가도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확신이 들 때는 온몸에 기쁨인지 아니면 슬픔인지 모를 전율이 느껴진다.

"엄마, 우리가 세이브 많이 해줬지요!”

아이들은 효자라도 된 것처럼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난 할 말을 잃고 비디오를 리와인드하듯 옛 생각에 잠긴다. 겨울마다 아이들은 주말 새벽 6시에 무료로 하는 루즈벨트아일랜드 실내 테니스장을 다녔다.

수영은 시영 메트로폴리탄 수영장에서, 음악도 학교 밴드부에서 배웠다. 아이들은 제대로 된 옷 한번 입어보지 못하고 자랐다. 얻어 입거나, 헌옷 가게에서 사입혔다. 다행히 남자 아이들이라 까다롭지 않았다.

형편이 핀 지금도 아이들은 브루클린에 있는 헌옷 가게‘비컨스 클로젯(Beacons Closet)’에서 사입는다. 나름대로 헌옷이 자기들에게는 편하단다. 빈티지 룩이라고나 할까.

남편이 하루하루 일을 줄여 생활고에 시달릴 때마다 난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되새기고 있다. 언젠가 나도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sooimlee.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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