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백악관 국가장애위 박동우 정책위원의 군산에서 워싱턴까지-상] 3살때 왼팔과 맞바꾼 생명
'외팔이' 놀림 마음의 상처 뒤로하고 고교때 이민
악으로 수영 20회 해내고 결국 체육 A학점 받아
박 위원은 민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시절 전북 군산에서 박종호(작고) 정숙(84)씨 부부 사이에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쟁의 끝자락은 전국 방방곡곡에 가난이란 그림자를 드리워 놓았고 박씨는 불과 3살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리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박씨의 부모는 열에 달떠 불덩어리가 된 장남을 붙들고 며칠을 안타까워 했지만 당시로선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한숨과 눈물 끝에 모든 것을 포기한 박씨 부부는 아기를 이불에 둘둘 말아 윗목에 놓아 두었다고 한다. "하늘의 뜻에 맡긴 거지요. 죽든 지 살든 지…"
천운이었는 지 아기의 열은 다음 날 씻은 듯 내렸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아기의 왼팔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왼팔의 자유와 맞바꾼 생명이었다.
박 위원 가족은 그가 9살 때 내장산 인근의 산골마을 전라북도 신태인으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 박 위원은 하루 3시간을 걸어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리동중학교 진학 후 등하교 시간은 왕복 5시간으로 늘었다.
학창 시절 박 위원은 상처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길에서 만난 동네 아이들이 '외팔이'라며 놀리고 어떤 아이들은 돌을 던졌지요. 속으로는 무척 화가 났지만 참았어요. 화를 내면 지는 것 아닙니까."
박 위원은 서울 영등포고교를 다니던 중 가족이민을 통해 미국에 왔다.
이민 수속이 예상보다 2년이 늦어지는 바람에 박 위원은 18세가 넘은 나이에 LA 하이스쿨 10학년생이 됐다.
미국은 장애인을 괄시하던 한국과는 너무 달랐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생겨 왔던 숱한 마음의 상처도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박 위원은 11학년 시절 인생과 고통을 대하는 시각을 바꿔 놓은 고마운 교사를 만났다. 체육교사인 '미스터 스미스'는 수영반에 들어 온 검은 머리 학생에게 "학기가 끝날 때 까지 한 번에 수영장을 스무 번 왕복하면 A학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전까지 체육시간에 단 한 번도 A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학생 박동우는 기를 쓰고 연습했다. 하지만 한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그에겐 20회 왕복도 만만한 도전이 아니었다. "시험을 보는 데 14번인가 15번을 채우고 나니 힘이 다 빠지는 거예요.
포기할 뻔 했는데 갑자기 '이번이 아니면 언제 체육에서 A를 받을 수 있겠는가'란 생각이 번쩍 머리를 스치는 거예요." 나머지 횟수를 어떻게 채웠는 지 기억조차 못 할 정도로 사투를 벌인 끝에 그는 결국 유일무이한 체육 과목 A학점을 받아 내고야 말았다. 박 위원은 "그 때의 경험이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크게 바꿔 놓았다"고 술회했다.
임상환 기자 limsh@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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