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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2] 신발제조업체 확산

"어부 떠난 바다서 대어 낚겠다"
자체 공장 짓기도 전에 연구 개발실부터 만들어
OEM 하며 브랜드 개발 배트민턴·테니스화 1위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월 440만원. 신발.의류 제조업체 학산의 이원목(58.사진) 사장이 받는 월급이다. 회사를 세운 1988년부터 21년째 한 푼도 올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올릴 생각이 없다. 사장 전용차도 없다. 지난해 추석엔 차례만 지내고 해외 출장 길에 올랐다. 장정 여럿이 양껏 먹을 만큼의 음식을 싸들고서다. 학산은 부산 공장 외에 중국 칭다오과 베트남 호찌민에 공장을 두고 있다. 그는 "고생하는 내 새끼들 보러 간다"고 말했다.

헌신적인 산업화 1세대 최고경영자(CEO)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이 사장은 여기서 한걸음 더 진화했다. 연구개발과 혁신의 유전자를 더한 것이다. 그는 자체 공장도 없는 상태에서 연구개발실부터 만들었다.

학산에 하청을 준 외국업체의 눈총을 피해 자체 브랜드를 만드느라 추운 겨울 허름한 창고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렇게 자체 브랜드 '비트로('빛으로'의 변형)'를 만들어내는 데 꼬박 6년이 걸렸다. 그는 "자체 공장을 갖기 전에 연구개발실부터 만든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본사 인력의 17%가 연구개발과 디자인을 맡는다.

세계적 컨설팅회사 딜로이트와 중앙일보가 선정한 '이노패스트' 학산의 처음과 끝은 CEO 이원목이다. '레드오션'으로 취급되는 신발시장에서 2008년 42%의 매출 성장률을 보인 그는 경영자의 최고 가치로 '도전'을 꼽는다. 주문자 생산방식(OEM)으로 납품만 해도 떼돈을 버는데 그는 기뻐하지도 만족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OEM으로 얻은 이익은 허수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유명 브랜드의 하청으로는 미래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국에 나이키 독일에 아디다스가 있다면 한국엔 비트로가 있다"는 게 그의 목표이자 자부심이다.

핵심은 신발이다. 그는 "나이키 같은 스포츠 브랜드들이 옷.신발.스포츠용품을 함께 팔아도 광고는 늘 신발만 한다"고 말한다. 독자 브랜드 꿈은 이미 꽤 여물었다. 배드민턴.테니스화에선 이미 세계 일류 제품을 만들고 있다. 세계적 브랜드 틈새에서 이룬 한국 1등이다. 스포츠 시장은 새 브랜드가 진입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다. 비결은 딴 게 없다. 흙 바닥에서 뛰어도 덜 닿도록 신발 바닥의 품질을 높였다.

한국.중국.베트남 3개국에서 첨단 소재인 고어텍스로 신발을 만들 수 있는 허가권을 모두 보유한 신발 회사는 학산이 유일하다. 품질은 수익으로 이어졌다. 2008년 자기자본 대비 이익률(17%)은 2007년보다 10배나 올랐다. 그래도 그에겐 성이 차지 않는다. "스포츠 브랜드는 그 나라 문화의 상징이자 자부심이다. 스포츠 용품의 기능은 계속 진화할 수 밖에 없다." 학산은 사람 신발이 아닌 개 신발도 만든다. 고도의 접착 기술이 필요해 해외 업체들이 모두 포기한 애완견 신발을 연간 12만 세트씩 수출한다.

그는 진반 농반 말한다. "사람은 발이 두 개지만 개는 발이 네 개잖아. 하나만 팔아도 두 배야. 이 시장이 커지면 엄청날거야." 그러곤 다시 정색을 하며 강조한다. "더 이상 신발 산업을 사양산업이라 부르지 말라."

많은 어부가 떠난 바다에서 대어를 낚겠다는 그는 독하다. 겨울에는 사장실 창문을 열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로 시작되는 뻔한 레퍼토리가 아니다. "나는 나를 극한상황에 갖다 놓는다. 이건 효율과는 다른 문제야. 정신의 문제지."

OEM 생산을 하며 6년간 주문업체 몰래 자체 브랜드 개발을 한 것도 이런 정신에서 시작됐다. 자체 브랜드의 판매가 늘어나자 2003년 한 외국계 스포츠 브랜드가 'OEM 제품을 더 이상 납품하지 말라'고 보낸 통지문을 그는 지금도 책상 서랍에 두고 있다. 훈장이자 각성제다.

고집불통일 법한데 그는 현실적이다. 학산에 변화가 가능한 이유다. OEM을 벗어나는 게 꿈이지만 OEM으로 실력을 쌓고 자체 브랜드를 개발할 자금을 모았다. 비트로 매장에는 비트로 제품 뿐 아니라 해외 브랜드 제품도 같이 판다. 비트로가 아직 약한 스포츠 캐주얼류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 제휴를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제품이라고 애국심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생소한 브랜드 '비트로'를 들고 전국의 테니스.배드민턴 동호회를 찾아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는 자신이 독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고민이다. "내 캐릭터가 강하다 보니 밑에 사람이 안 큰다. 이제 허리 부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으로 사람에 투자하려고 한다."

다시 혁신이 화두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을 작정이다. 그는 "사업을 해야지 도박을 할 순 없다"고 말한다. 그가 정한 성장의 속도는 "(기업의) 심장이 터지지 않을 만큼"이다.

또 한 가지 지론도 있다.

"한국에선 경쟁력이 없다고 다들 해외로 옮기는데 생산 거점은 반드시 한국에 있어야 한다. 한국 거점을 없애면 위기에 처했을 때 기댈 곳이 없어진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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