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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8] 2004년 어바인 시의원 당선…미국 생활 제3막 시작

정치적 롤모델, 정신적 아버지 신호범 의원이 큰 힘

정치가 항상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을 의식해야 했다. 혼자 옳다고 해서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역풍도 감수해야 했다.

LA평화통일자문회의의 국제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한미의원연맹 행사차 하비에르 베세라 연방 하원의원과 한국에 동행한 일이 있었다. 베세라 의원은 남미계로 하원에서 가장 비중이 큰 예산결산위원회의 선임의원이었다.

3박 4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비교적 많은 곳을 둘러보았다. 베세라 의원은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놀랐다면서 자신이 한인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지 물어왔다. 나는 10가지 리스트를 제시했는데 미국 의회가 '한인 이산가족 상봉 결의안'을 통과시켜 달라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미국에 사는 한인 이산가족도 북한을 방문해 가족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이 문제를 평화통일자문회의 국제위원장으로서 본격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따가운 시선이 날아왔다. 너무 일방적으로 나서지 말라는 암시였다. 활동이 많아지자 부정적인 여론도 그만큼 따라다녔다. 성과를 인정해 주기보다는 지엽적인 문제로 꼬투리를 잡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반발하거나 맞서지 않았다. 한인사회에서 일을 하려면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신경을 써야겠구나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었다.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며 뛰어든 민주당협회 활동 역시 나를 점점 성숙한 정치인으로 변화시키고 정치에 대해 새로운 꿈을 갖게 했다. 어느 새 주위에서 '강석희는 언젠가 정치를 할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돌았다.

2002년 8월 우리 가족은 8년간의 애너하임 생활을 정리하고 어바인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나는 래리 에이그런 시장을 만나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접어들었고 2004년 어바인 시의 시의원이 되었다. 세일즈맨 한인사회 봉사자에 이어 마침내 미국 생활 제3막이 시작된 것이다.

◇또 한 분의 아버지 신호범

입양아 출신으로 대학교수 워싱턴 주 상.하원 의원을 거쳐 상원 부의장을 지내고 있는 신호범 의원. 그는 나의 정치적 역할 모델이자 정신적 아버지다. 2000년 워싱턴 DC에서 처음으로 대면한 후로 줄곧 나의 정치적 멘토로서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해주고 계시다.

2004년 2만 가구를 목표로 '발바리 캠페인'을 벌이고 있을 때 신 의원은 몸소 워싱턴 주에서 어바인까지 오셔서 나와 함께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며 큰 힘을 보태주셨다. 69세로 적지 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콧날이 시큰해 온다.

힘드실 것 같아 이제 그만 하시라고 하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걸어야죠. 나는 하루 종일 걷는 걸 1년도 넘게 해봤어요" 하시며 끝까지 내 곁을 지켜주셨다. 때로는 점심도 거른 채로 부지런히 다니시는 통에 도리어 내 숨이 찰 지경이었다. 잠시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순간에도 홍보 책자를 돌리시며 간곡히 한 표를 부탁하셨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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