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2] 돈은 벌었지만 보람을 찾지 못하던 터에 한미장학재단 봉사 제안받고 즉시 수락
동포들의 절망과 고통이 가슴을 후벼팠다. 내 동포들이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했나. 나 한 사람 내 가정만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왔던 나의 이기적인 모습이 떠오르며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총을 들고 필사적으로 가게를 지키는 동포들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진한 동포애를 느꼈다. 그들의 절규와 아픔이 바로 내 아픔이었다. 한인사회는 결코 내가 외면해서도 외면할 수도 없는 나의 공동체였다.우리가 정치적인 힘이 있고 발언권이 있었다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백인들처럼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미국 내 한인동포가 200만을 헤아린다고 하지만 흩어져 있는 모래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누구 하나 한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존재가 없다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LA 경찰은 정치적 영향력이 큰 백인 부유층 지역은 철통같이 보호해 주었지만 한인사회처럼 정치적으로 무력한 동네는 외면한 채 폭도들이 마음껏 약탈하도록 방치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LA폭동을 계기로 한인사회에서는 정치력 부재에 대한 자성이 일기 시작했고 그동안 먹고 살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다른 커뮤니티와의 유대 관계를 소홀히 해왔던 점을 깨달았다. 정말이지 엄청난 값을 치르고 나서 얻은 뼈아픈 교훈이었다.
흑인 동네에서 장사해서 번 돈으로 고급 승용차를 몰고 좋은 집에 살면서 주변의 못사는 흑인들을 돕는 데는 상당히 인색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흑인들이 한인 업주의 고급 승용차를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자기네들끼리만 잘 먹고 잘산다며 반감을 품을 만도 했다.
폭동은 한인사회에 깊은 상처와 뼈아픈 반성을 남겼다. 나 역시 한인사회를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비즈니스에서 탄탄한 기반을 잡아 돈도 제법 벌었지만 더 이상 큰 보람을 찾지 못하던 터였다. 나는 마침내 나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한인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되돌아보면 LA폭동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였다. 또한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커다란 영적인 힘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사회 활동의 첫걸음을 내딛다
일단 마음은 정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활동을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무렵인 1993년 초 내가 다니던 교회의 교인인 김기순 선생이 어느 날 나를 불렀다.
선생은 한인 1세대의 상징적 인물인 김명한 옹의 막내아들로 한인들이 존경하는 어른이었다. 한인사회의 첫 1.5세 2세가 중심이 된 '한미연합회'(Korean American Coalition)와 '청소년회관'(Korean Youth Community Center)을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선생은 1955년 19세의 나이로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LA로 유학을 왔다고 한다. 그런데 도착한 날이 2월 28일 바로 3.1절 전날이었다. 그는 그 어린 나이에도 3.1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수소문을 해서 LA 시내에 있던 '대한국민회'를 찾아갔다. 다음 날 3.1절 행사에 참석한 것은 물론이다. 애국심 넘치는 선생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한편 선생의 부친 김명한 옹이 창업한 '김방아'란 떡집은 한인들 사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었다. 지금도 후손들이 LA 코리아타운 한복판에 그 정겨운 간판을 내걸고 운영하고 있는데 한인사회의 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정표가 되고 있다.
김기순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서킷시티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선생이 구입한 워크맨에 문제가 생겨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하러 갔다가 처음 만났고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다시 우연히 마주쳤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5년 이상 같은 교회의 교인으로 지내왔다.
선생은 나를 불러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한미장학재단의 이사로 참여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동참의 뜻을 밝혔다. 평소 존경하는 분의 권고이기도 하거니와 어떤 형태로든 한인사회를 위해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와 교회밖에 몰랐던 나는 이 모임을 통해 비로소 사회활동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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