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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기획-힘들지만 훈훈한 연말] 알링턴 거주 이상현 옹

“약값 대신으로 봉사”
한인 행사장마다 ‘약방의 감초’
인생을 찍는 할아버지 사진가

워싱턴 한인 행사장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할아버지 사진사가 있다. 바로 알링턴에 거주하는 이상현 옹(73·사진)이다. 그는 오늘도 백발이 성성한 짧은 머리에 다리 한쪽을 절뚝거리는 불편한 몸으로 SLR(렌즈교체식) 사진기를 목에 건채 현장을 누빈다. 그에게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묻자 “사진은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며 “행복한 사람들의 사진속 모습에서 나도 덩달아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 이민 제2의 인생과 불의의 사고

이상현 옹은 지난 1972년 가족과 함께 도미, 자동차 정비공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 기름을 손에 묻히는 일이었지만 한국에서 택시 운전을 했던 탓에 차량 손보는 일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자동차 정비를 통해 온가족 영주권도 획득하고 삶에 안정도 찾아갔다. 그뒤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그러던 1980년 10월 6일 뜻밖의 불운이 찾아왔다. 일꾼들에게 연락하고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차를 몰고 나서던 중이었다. 갑자기 맞은편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와 곧장 돌진해 왔다. 너무 순식간이어서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가 구조대원들이 차량 프레임을 뜯어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나중에 보니 오른쪽 팔 이외에 성한 곳이 없었다. 뼈란 뼈는 모두 다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식물인간이 될까 걱정도 많았지만 다행히 3개월 후에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곳은 회복됐지만 왼쪽 다리가 문제였다. 목발을 뗄 수 없었고 몸이 성치 못해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다. 이 옹은 장장 7년이나 변변한 돈벌이를 할 수 없는 굴욕의 세월을 보냈다.

◇ 사진과의 만남

2005년 암으로 아내를 잃은 후 깊은 외로움이 찾아왔다. 이때 만난 것이 사진이었다.

“어느날 노인 모임에 나갔는데 노인들이 사진을 잘 못찍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찍어주겠다’고 ‘그게 뭐 어렵냐’ 하면서 사진기를 손에 잡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자동카메라(흔히 똑딱카메라)로 노인 행사때마다 찍어주는 일을 했다. 그러다 사진에 대해 점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2년 정도 사진기를 지니고 다니면서 식견도 늘었다. 제대로 사진을 배우기 위해 SLR 사진기도 구입했다. 대학에서 사진을 공부한 아들의 도움도 컸다. 사진작가협회에서 주최한 사진 강좌도 이수했다. 이외에도 주말이면 ‘출사(出寫)’를 업으로 삼는 동료 노인들을 따라 산으로 들로 사진 찍기도 즐겼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주변의 부탁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일주일이면 기름 1통이 모자랄 정도로 왕래가 잦다. 하루에 100마일 이상 달릴 때도 많았다.

◇ 사진 나누기는 약값 대신

이 옹은 이제 자신이 배운 사진 기술을 주변에도 전하고 싶어 한다. 나이 들어 도전에 두려움을 느끼는 노인들에게 친절한 안내자가 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사진 강좌 책자도 꾸준히 써 나가고 있다.

사진을 일삼아 찍다 보니 얻은 것이 또 있다.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다리에 큰 힘을 얻고 건강을 되찾았다. 사실 이 옹이 거의 무료 봉사로 사진 찍는 일에 나서는 것도 일종의 ‘약값 대신 봉사’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상현 옹은 “사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의욕을 상실한 채 남은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나에게 있어서 사진은 취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천일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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