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유럽여행-5] 과연 카르타고 후예들을 만나볼 수 있을까?
로마와 카르타고의 120년 포에니 전쟁은 로마 제국의 시발점
크루즈에서 김치 시식…객실마다 삼성TV 비치돼, 한국인 자부심에 뿌듯
크루즈 여행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저녁만찬인데 테이블 배정이 아주 흥미로웠다. 우리 부부를 포함해 Lee씨 성을 가진 커플 3쌍이 나란히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아마도 같은 성 가진 사람들을 함께 앉도록 배려한 것 같았다. 우리 부부 이외 Lee씨 성을 가진 승객들은 모두 중국계 미국인들이었다. 55세쯤 되는 이보천이란 이름의 텍사스 거주 부부, 북버지니아 출신의 30대의 이지충이란 부부였다. 이들은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김치, 김치찌게, 라면, 김, 그리고 TV드라마 등등을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유람선의 객실마다, 그리고 배 이곳 저곳 삼성 TV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승객 4400명, 승무원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배의 규모를 감안할 때 삼성 TV가 이 배에만 줄잡아 3000대는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와 기분이 좋았는데 우리의 고유 음식인 김치까지 그렇게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더더욱 신이 났다.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오니 내일 아침 도착하는 튀니시아의 날씨, 가볼 만한 명승지와 교통편 등등을 알리는 안내지가 놓여 있었다.
여기서 잠시 역사 이야기를 간단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오늘날의 튀니시아에 있었던 고대 카르타고(유럽인들은 카르타제라고 부른다)는 BC 1200년~BC 800년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의 가나안 지역에 걸쳐 존재했던 국가다. 히브리어를 쓰는 무리였다고 한다. 그들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누비면서 해상무역을 했고 이곳 저곳에 거점 도시(도시국가)를 세웠다. 히브리어로 ‘상인’이란 단어가 ‘페니키아’라 페니키아인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들이 세운 도시국가중 나중에 아주 강성한 나라가 된 것이 바로 ‘카르타고’인 것이다.
한편 BC 600년대에 이탈리아 반도에는 로마가 탄생한다. 트로이 전쟁에서 패한 트로이 왕자가 도망 나와 멀고 먼 항해 끝에 로마에 도착했고, 생명의 위험을 느낀 조카가 삼촌에게서 도망나와 늑대 젖을 먹고 자랐는데 그의 손자가 로마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 로마는 로마 언덕의 양치기 무리들이 세운 깡패집단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잔치한다고 이웃 마을 사람들을 초대한 뒤 남자들은 다 죽이고, 여자들은 부인 삼아 가족을 이룬 흉악한 무리들이었다. 그런 배경의 출신들이었던 만큼 남의 문화와 장점을 쉽게 배우고 포용하면서 영토를 늘려나가 BC 250년경 이탈리아 중남부를 거의 통일했다.
그러고 보면 서부 지중해 지역에서 카르타고와 신흥 국가 로마의 패권싸움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시실리섬을 둘러싸고 BC 264년 시작돼 25년간 지속된 제1차 포에니 전쟁(카르타고와 로마전쟁), 그리고 20년 뒤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의 복수전으로 시작된(BC 219부터 20년동안) 제2차 포에니 전쟁, 이어 카르타고가 4년간 농성으로 버티다 망할때까지(BC 146) 모두 120여년에 걸쳐 전개된 이 전쟁은 로마가 전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시발점이 됐다.
이같은 역사적 현장을 내일 방문한다는 안내서였다.
다음날 아침 (밤 사이 배는 이미 튀니시아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크루즈 14층(Deck)의 부페식당에서 눈 아래 펼쳐진 튀니시아를 바라보며 아침을 먹으면서 몇해전 이집트 여행 당시를 떠올렸다.
“현재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만들고 파라오(왕)를 미라로 만들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후예인가, 아니면 인근 아랍국가에서 굴러들어온 돌인가?”
나는 그때 이집트에서 원시 기독교라 할 수 있는 곱틱 기독교 신자들이 이집트의 박힌 돌인데 굴러 들어온 돌인 아랍인들이 주인 행세를 하며 곱틱 기독교인들은 소수인종으로 전락해 버려진 사람들로 취급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번 튀니시아 방문중 과연 카르타고 제국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배에서 내려 3곳을 구경하기로 했다. 전통시장인 메디나(medina), 안달루사 아랍인들이 지었다는 흰색과 푸른색(white and blue)만 있는 아름다운 마을, 그리고 소위‘카르타고의 폐허’이렇게 3곳 말이다.
홍콩에서 온 모녀와 4인승 택시를 대절해서 나섰다. 아주 고성능 카메라로 사진찍기에 바쁜 말괄량이 딸을 쫓아다니느라 바쁜 그의 어머니가 허둥대는 모습이 꽤나 재미있었다.
전통시장은 꼭 영화 007이나 인디애나 존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음흉한 분위기에 괜한 스릴을 맛볼 수 있었다. 아마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통 카르타고의 후손이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굴러먹다 들어온 아랍계통 사람들 아닌가 하는 선입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안달루사 아랍빌리지는 모든 집들이 흰색, 푸른색으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계적 관광거리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카르타고의 폐허’는 철책으로 막아놓아 철책 밖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규모가 대단할 것으로 짐작되는데 계속 발굴을 이유로 출입을 못하게 하니 참으로 아쉬웠다.
카르타고 대학, 한니발 병원 등등 가는 곳곳의 호텔, 상점, 은행. 하다 못해 음식점까지 카르타고와 한니발의 이름을 이용한 상품을 팔고 있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버는 형국 같았다.
끝으로 007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의 끄나풀처럼 보이는 우리 택시 운전수는 튀니시아가 리비아보다 더 개방적이고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자랑을 했다. 프랑스와의 밀접한 관계에도 큰 자부심을 가진 듯 했다. 사실 그곳의 자동차들 대부분이 프랑스제 뿌조, 씨트랭, 르노였고 돈은 달러는 안 받고 유로화만 통용됐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전통시장 메디나에서는 구경만 하고 진짜를 파는 바자로 안내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상점에서 내가 물건 흥정할 때면 자기네 말로 커미션을 챙기는 듯 했다. 하기사 저개발국가에다 아랍상인들이니 당연하리라.
그러나 30 유로 부르는 가죽 슬리퍼 같은 것을 5유로까지 깎아 놓고 나서, 최후로 다시 3유로 아니면 안 산다고 나서는 베테랑 흥정꾼인 나에게는 통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배로 돌아오면서 혼자 뇌까렸다.
“그래 포에니전쟁으로부터 2000여년이나 흐른 오늘날 카르타고의 후예들을 만나 본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무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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