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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서울로 끌려간 녹두장군 전봉준, 끝까지 대원군 감싸다 처형돼

1894년 두 차례에 걸쳐 전라도 일원을 뒤흔든 농민봉기를 이끈 녹두대장 전봉준. 그해 겨울 우금치 싸움에서 그의 부대는 끝내 패했다. 순창으로 몸을 숨겼던 그는 한 달여 만에 지방 민병의 손에 사로잡혔다.

황현은 그때 그의 언행을 이렇게 기록했다. "전봉준이 벼슬아치를 보고는 모두 너라고 부르고 꾸짖으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내 죄는 종묘사직에 관계되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너희들이 어찌 함부로 다루느냐'고 했다. 잡아가는 자들이 이를 보고 '예예' 하며 잘 모셨다." 칼 찬 관군의 호위를 받으며 들것에 실려 가는 전봉준(사진)의 모습에서 굴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일본공사관에 넘겨졌다. 이노우에 공사와 우치다 영사 그리고 법부대신 서광범 등 심문관들로부터 5차례 이상 취조가 이어졌다. 심문의 초점은 그가 농민군을 일으킨 것이 대원군의 지시 내지 사주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캐내는 데 맞춰졌다.

일본은 겉으로는 협조하는 체하면서 뒤로 반일 공작을 펼친 대원군을 제거하고 싶었다. 그러나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원군과의 관련성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가 세간의 통념처럼 반봉건 농민전쟁을 이끈 혁명가였다면 왜 목숨 걸고 보수의 최고봉 대원군의 정치생명을 지켜주려 했을까? 의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와 그를 따라 떨쳐 일어났던 농민군들은 모두 철두철미한 애국자이자 원초적 민족주의자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들을 읽노라면 그때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민중주의 역사가들의 주장에 동감하기 어렵다.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청일전쟁이 터지는 기폭제가 되어 전봉준의 의도와는 달리 조선에서 일본의 패권을 강화하는 역설을 범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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