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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워싱턴 DC와 세종시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대하소설을 통해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조명해온 작가 조정래는 그의 '태백산맥'에서 미국인들에 대해 아주 단호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일단 필요로 하는 일에 대해서 분명한 이유 확실한 근거 그리고 충분한 납득이 되기 전에는 결코 단념하지 않는 미련스럽도록 철저한 종족이다."

조정래는 이를 '철저성'이라는 말로 결론지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역사에도 이 '철저성'이 드러난다. 연방 수도의 건립은 1788년 미합중국 헌법의 통과와 함께 정해졌다. 2년 후인 1790년 연방의회는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에게 포토맥 강가 인근에 수도의 위치를 정하도록 권한을 위임했고 다음해 워싱턴은 지금의 워싱턴 DC를 수도로 확정했다. 그러나 실제로 수도를 필라델피아에서 옮겨온 해는 그 뒤 9년이 지난 1800년이다.

워싱턴 DC는 수도로 어울리지 않는다. 정신사적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의 중심은 청교도와 하버드대가 떠오르는 보스턴이 더 적합하다. 또 정치적으로는 미합중국을 탄생시킨 필라델피아가 자연스럽다.

또 오늘날 미국의 키워드가 될 '다양성'으로 치면 뉴욕을 능가할 도시가 없었다. 여기에 수도 후보지로는 남부 도시들도 있었다. 워싱턴과 제퍼슨 등 걸출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배출한 남부는 당시 농업 국가였던 미국의 수도로서 설득력이 있었다.

워싱턴 DC는 안보 면에서도 약점이 있었다. 적의 함대가 대서양에서 물길을 따라 워싱턴 DC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영국 함대는 1814년 워싱턴 DC를 침공해 지역 대부분을 불태웠다.

또 경제력에 있어서도 워싱턴 DC는 취약하다. 농업과 교역 산업 발전의 가능성이 없는 곳이었다. 비교적 활발했던 경제활동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젊은 날 목격하고 분노했다는 노예매매 정도다. 지금 한인동포 미셸 리 교육감이 개혁의 칼을 대고 있는 워싱턴 DC의 오래된 교육문제는 "미국의 수도가 부를 창출할 능력이 없는 곳에 세워졌다"는 오랜 역사의 뿌리를 말해준다.

이런 약점에는 불구하고 워싱턴 DC를 수도로 고집한 이유는 간단하고 확실하다. 지역균형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남북간의 지역 특성에 민감했다. 가족단위의 자급 농업과 제조업에 기초를 둔 북부와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수출 농업에 주력하는 남부가 서로 이질감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남부도 아니고 북부도 아닌 워싱턴 DC는 지역특성을 초월하는 연방 정부의 이상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남북전쟁 중에도 링컨 대통령은 워싱턴 DC를 대대적으로 건설했다. 미국을 하나로 아우르는 워싱턴 DC의 상징성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워싱턴 DC는 이유와 명분 그리고 합의가 철저하게 조화된 정치 도시였다. 요즘 한참 유행인 지식과 산업 행정의 복합도시 따위의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워싱턴 DC는 예나 지금이나 말과 생각 그리고 법을 통해 미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곳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워싱턴 DC의 역사에 비하면 한국의 세종시 건립은 속전속결 정책의 상징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공약으로 제시한 후 입법과 위헌 판결 수정 입법의 과정을 거친 세종시 건립은 2012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600년 역사의 수도를 일부 옮기겠다는 선거공약이 현실화 되는데 10년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는 것인다. 박진감은 느껴지지만 '철저성'은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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