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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부마 항쟁은 10·26 사건의 전주곡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은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마치 80년 5월의 광주를 예고하는 듯한 상황이 그 7개월 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78년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민주공화당보다 1.1%의 높은 득표율을 보였고 79년 8월 YH 여공들의 신민당 당사 농성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소용돌이의 직접적 발단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뉴욕 타임스 인터뷰 기사였다. 9월 16일 뉴욕 타임스에 게재된 기사에서 김영삼은 이란에서의 재앙은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의 실책에 의한 것이며 한국에서 주한 미국대사관이 유사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고 언급하였다.

이에 정부.여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10월 4일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정치적 파장이 커지자 미국은 10월 6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소환하였고 10월 13일 신민당에서는 의원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 상황에서 부산과 마산의 학생.시민들이 김영삼 총재 제명 반대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20일에는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시위는 진정된 것으로 보였지만 실은 부산과 마산의 민주화 시위는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한 방법을 둘러싸고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과 청와대 경호실장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이것이 10.26 사건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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