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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살 한의원장 남편 어수학씨 최초 고백···헛소문·특정기사로 '두번 상처'

"아내는 선행 많이 한 사람, 범행동기 정말 모르겠다…가족관련 소문은 모두 거짓"

어수학씨(58)에게 아내(고 이정애 원장)의 빈자리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도 믿지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6일 용의자가 잡혔다는 소식은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다음날 터진 어느 한인 신문의 기사 내용은 마음을 도려내는 상처를 줬다.

어씨는 7일“억울한 심경을 밝히고 잘못된 내용을 바로 잡아주기 바란다”며 언론사중에서는 최초로 본지와 공식 인터뷰를 가졌다.

현재 유족중 아들(의대생)은 학업차 남부지역에, 딸(의대졸업)은 외할머니 병간호차 한국에 가 있어 집에는 어씨 홀로 남아 있다. 이런 어씨를 측근 정모씨가 돌보고 있다. 다음은 어씨와 가진 일문일답.

- 용의자에 대해 짐작되는 부분은?

“어안이 벙벙하다. 이유를 모르겠다. 우선 이번 용의자 대니 김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단지 대니 김의 동생 케빈 김이 2004년 한의원 건물의 일부 공사를 맡았었다. 우리 가족이 처음 입주하고 한의원을 개원하기 직전이었다. 공사는 1층 뒤편에 환자실 3칸을 조성하고 지하실 누수 등 하자 보수 공사였다. 공사가 끝난 후 대금은 모두 지불했다.

문제는 그 후 6개월쯤 뒤 뒤뜰 주차장 배수문제로 카운티 지적사항이 나와 재판까지 벌여 결국 공사를 다시 해야 했다. 콘크리트나 아스팔트 대신 모레와 석분을 깔고 블록으로 마무리했다. 케빈 김에게 맡긴 공사의 후유증이었지만 자비를 들여 별도로 공사를 다시 했다.

이처럼 손해가 나자 당시 한 변호사는 ‘공사업체에 소송을 하면 어떠냐’고 했지만 아내는 ‘한인끼리 뭘 그러느냐, 그냥 내가 손해 보고 마는 게 낫다’고 했다. 아내는 이처럼 금전 문제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 건축업자였던 용의자와 갈등을 빚었다는 내용은.

“전혀 근거 없는 얘기다. 언급한대로 당시 모든 공사대금은 이미 다 지불한 뒤였다. 더구나 공사는 그의 동생이 한 것이고 형과 그 문제로 갈등을 빚을 이유가 없다. 또 한의원 진료기록을 보니 대니 김은 그 부인과 함께 한의원을 자주 방문해 아내(이정애 원장)로부터 꾸준히 진료를 받아 온 것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대니 김의 친지는 사건 발생 하루 전날에도 진료를 받은 사실이 있다. 큰 갈등을 빚었다면 그렇게 왕래를 했겠는가.

( 후배 정씨의 언급: “사건이 있기 얼마 전부터 한의원에 돈이 많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갈등이나 원한 문제는 분명 아닌 것 같고 금품을 노려 침입했다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생각은 되지만,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추측이다. 어떤 신문에 언급됐듯이 ‘팔을 뒤로 묶었다… 핏자국은 금고 앞까지 찍혀 있었다’ 등의 내용은 우리도 모르는 얘기다. 어떻게 그런 기사가 나왔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기사가 나가면 수사에도 혼선을 주지 않을까 걱정된다”)

- 모 신문에 범행을 재구성한 내용도 있지 않나.

“기가 막힐 따름이다. 그 신문은 마치 범행 현장에 기자가 있었던 것처럼 매우 세부적인 내용까지 언급돼 있는데 이는 유족인 우리도 모르고 아마 경찰도 모를 것이다. 기사에는 심지어 ‘금고의 번호를 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 원장은 이를 거부했다’는 표현도 있다. 이건 결국 돈 욕심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말이 아닌가. 아내는 일평생 남에게 베풀며 살아 온 사람이다. 이는 고인에 대한 심각한 인격 모독이다.”

- 부인에 대해 소개한다면.

“한의원에 노인들의 왕래가 잦았다. 그 때마다 아내는 ‘버스로 가시는데 불편하다’며 직접 차량으로 모셔다 드리기도 했다. 한동안은 매주 수요일 인근 노인아파트 3곳을 돌며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정기 이동진료를 해 왔다. 이 일을 남편인 나도 몰랐다.

수년간 이동진료를 하면서 나중에는 같은 한의 업계에서 ‘손님이 준다’고 불평하자 올해 2월에 중단하기도 했다. 아내는 자녀들을 모아 놓고 항상 한 말이 있다. ‘돈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면 지금 공부 그만두고 일을 시작해라. 엄마를 따라 의료인이 되기로 했으면 돈에 연연하지 말고 환자를 돕는 일에 나서자’고 당부했다. 아내는 결코 돈으로 원한 살 사람이 아니다.”

- 잘못 알려진 사실들은 또 무엇이 있나.

“모 신문에 아내 장례식때 ‘한국에서 이 원장의 모친과 여동생이 참석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대표적인 오보다. 밝히기 꺼려지는 부분이지만 처제는 먼저 세상을 떠난 고인이다. 그로 인해 장모님께서 충격을 받으셨고 워낙 연로하셔서 건강도 좋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도 건강이 염려돼 가족 논의끝에 사건을 알리지도 않았다. 또 그 신문에 내가 인터뷰한 것처럼 몇차례 보도됐는데 나는 한번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다. 용의자 검거가 발표된 6일에도 한 기자가 찾아와 인터뷰 요청을 하길래 ‘하고 싶은 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물며 그 기사에서 ‘아들도 충격을 이기지 못해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라는 내용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아들은 본래 다른 지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다. 졸업까지는 아직 1학기가 남아서 나머지 학업을 위해 집을 떠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억측 보도하지 말아 달라.

그 신문에 이같은 내용들에 대해 몇차례 정정 요청을 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과도 받지 못했다. 아내의 사진이나 건물 사진도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사용하고 있다. 너무 화가 난다. 고인과 유족의 명예를 더럽힌 해당 언론에 반드시 법적 대응을 하겠다.”

-가족 관련 헛소문도 많다는데…

“대표적인 게 ‘재혼을 했다’는 내용이다. 내가 몇번째 남편이니 애들도 전 남편 자식이니, 정말 이런 악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문제고 무분별하게 이를 소개하는 언론도 문제다. 우리 부부는 분명 초혼으로 만났다. 당시 아내는 24세, 나는 27세였다.

더 이상 헛소문에 쐐기를 박기 위해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겠다. 아내가 첫 딸을 낳을 때 남편인 내가 집에서 받아내고 탯줄까지 잘라줬다. 당시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는데 내가 급성 맹장염이 걸려 수술하는 바람에 수중의 돈을 모두 써버려 아이 낳으러 갈 병원비가 없었다. 우리는 신혼초 그토록 어렵게 살았다.

미국에도 1993년 온 가족이 취업이민으로 오게 됐고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후에 아내는 한의학에 전념하게 됐다. 더 이상 허위사실을 퍼뜨리지 말아 달라. 한인사회에 간절히 당부한다.”

천일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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