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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창호지가 사라지자 소통은 단절로…

1880년 원산에 세워진 일본영사관을 필두로 1890년대 들어 서구 열강의 공관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교회 그리고 외국상관 등 서양식 건축물들이 도회와 개항장에서 눈에 띄게 늘어나자 이 땅 사람들의 주거생활에도 양풍(洋風)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색을 입힌 돌 위에 쇠난간을 두른 베란다로 둘러싸인 두 개의 정원을 가로질러 응접실로 안내됐다. 방 안에는 외국산 탁자와 약간 촌스러워 보이는 벨벳 의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아취 있는 벽과 깨끗한 마루와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프랑스식 시계들이 그 증거처럼 느껴졌다."

1890년대 중반 여주의 한 양반가 집 안 풍경을 묘사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목격담은 이를 잘 말해준다. 왕실을 필두로 고위관료와 재력가들은 앞다퉈 양옥을 짓거나 한옥을 양식으로 개량했다.

문짝의 창호지를 뜯어내 유리를 끼웠고 대청마루를 응접실로 바꿨으며 목욕탕도 집 안에 들였다. 부호들은 재력을 과시하고자 수입 가구를 집 안 가득 채웠다. 프랑스제 뻐꾸기시계 독일제 거울과 카펫 그리고 침대는 그때 개화와 부의 상징이었다.



1923년 김유방은 '개벽' 34호에 실은 글에서 양옥 보급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했다. 일제 치하를 거쳐 해방 이후 양옥이 전통가옥을 대체하면서 주거문화에 일대 격변이 일었다. 사랑채.안채.아래채 별개의 채로 연결된 열린 주거 공간이 안방 거실 주방 화장실 등 하나의 공간 속 닫힌 방으로 바뀌었다.

창호지 한 장으로 막아 숨소리나 기침 소리까지 넘어 나오던 소통의 문도 현관 철문과 나무문으로 바뀌자 이웃은 물론 가족 간의 단절은 깊어만 갔다.

장작을 때서 온돌을 덥히던 시절 따뜻한 아랫목은 할아버지.할머니 차지였지만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아파트 밀림 속 우리의 거실에는 더 이상 윗목은 없다. 가족 성원 사이의 서열이 뒤집힌 오늘. 이웃과 가족 모두에게 열려 있던 옛 주거문화가 그리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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