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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경제 "바닥 쳤다"엔 공감···'회복의 길'엔 이견

미 경제를 보는 고수들의 엇갈린 시선

"경기침체는 끝난 것 같다(The recession is very likely over)."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15일 워싱턴 브루킹스연구소에서 한 말이다. 늘 유보적인 버냉키의 말투에 비춰보면 이날 그의 말은 단정적인 선언이나 다름없다. 얼핏 봐서는 대공황 초기에 FRB 의장을 지낸 로이 Y 영의 장담을 떠올리게 한다.

영은 1930년 초 미 주가가 회복하자 "침체가 끝난 것 같다"고 말한 뒤 재할인율을 올렸다. 이른바 '창구지도'로 은행들의 대출을 직접 억제하기도 했다. 그 결과 미 경제는 대공황의 늪으로 밀려들었다. 버냉키가 최근 들어 경기회복을 부쩍 자주 언급하자 일부 전문가는 성급하다고 비판하면서 70여 년 전 영의 경솔함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미국 경기침체의 시작과 끝을 판단할 때 살펴보는 산업생산.실업률.소비.개인소득 지표들을 보면 버냉키 진단이 터무니없지는 않다. 실업률을 제외한 세 가지 지표가 올 6월 말 이후 하락세가 진정되거나 회복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개인소득은 올해 초 가파르게 줄었으나 7월 들어 진정됐다. 전달보다 0% 증가했다. 소비는 올 3월까지 줄었으나 이후 늘어나고 있다.

아직은 변동이 심하지만 7월까지 증가 추세가 이어졌다. 산업생산도 올 7~8월 두 달 연속 늘어나고 있다. 일반적 으로 실업률은 경기가 회복한 뒤에도 3~4분기 정도 계속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버냉키는 한걸음 더 나갔다. "현재 우리가 회복기에 들어서 있다는 데 경제분석가들이 동의한다"고 말했다. '닥터 둠'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경제학) 교수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컬럼비아대)와 폴 크루그먼(프린스턴대) 교수의 진단도 크게 다르지 않다.
표현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 "회복의 길 위에 올라섰다"고 입을 모았다. 침체 끝에서의 회복 여부는 이미 논란의 대상이 아닌 셈이다.
"침체가 끝나고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컨센서스(의견일치)가 이뤄진 듯하다"고 미 경제분석회사인 이코노미스트닷컴의 마크 잔디 수석 경제분석가가 16일 말했다. 이어 그는 "경기침체의 시작.종료를 공식적으로 진단하는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경기판단위원회(BCDC)가 열린다면 2009년 3분기에 침체가 끝났다고 진단할 것"이라며 "침체 끝이나 회복 시작 여부는 더 이상 쟁점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쟁점일까.
글로벌 시장은 미 경제 회복의 속도.강도.기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경기회복의 여부가 아니라 회복의 질(質)로 시장의 관심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버냉키는 "2010년 회복이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지만 미 경제가 꾸준히 되살아난다는 쪽이다. 버핏도 비슷한 전망을 내놓았다. "기업인과 소비자들이 거품시대 생각과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려 회복이 더딜 수는 있지만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금융위기를 예측해 스타가 된 루비니 교수는 회복이 이어지지 못한다는 쪽이다. 그는 리먼브러더스 파산 1주년을 맞아 "은행 등 미 금융회사 1000여 개가 무너질 것"이라며 "이는 살을 차례로 도려내 죽이는 고대 중국의 형벌(death by a thousand cuts)처럼 미 경제를 서서히 무너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글리츠는 "상업용 부동산 부실화가 또 다른 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며 "미 경제의 미약한 회복이 한순간에 중단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양쪽의 전망 차이가 너무나 크다.
그만큼 미국 경제의 앞날이 여전히 불확실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때 월가 이코노미스트들은 이른바 '중도가설(Happy Medium hypothesis)'에 의지하곤 한다.
경제는 극단적인 전망 사이의 중간 궤적을 따라 움직일 때가 많다는 얘기다. 중도가설은 경제학자들의 엄밀한 검증을 거친 것은 아니지만 연봉과 명성을 걸고 경제 앞날을 예측해야 하는 월가 이코노미스트들이 마음속으로 의지하는 격언과 비슷하다.
중도가설을 믿는 월가 이코노미스트들은 요즘 한 가지 변수를 주시하고 있다. 미 금융회사와 가계의 대차대조표(자산 상태)다. 집값 폭락으로 빚어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깊은 상처를 입은 금융회사와 가계가 '올 4분기 이후 얼마나 빨리 자산 상태를 건전화하는가'에 따라 경기회복 속도와 폭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현재 주식시장은 아주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금융회사의 자산 가운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원자재 가격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 집값 하락세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반면 가계의 빚을 줄이는 데 가장 중요한 임금소득은 쉽게 회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실업이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내년 6월 말까지 실업률이 계속 올라 10.5~12%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미 가계의 부채 줄이기가 더디게 이뤄질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래서 월가 전문가들은 이번 침체가 대공황 이후 최악이지만 과거처럼 '깊은 침체 뒤 가파른 회복' 패턴은 보이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블룸버그통신의 설문 조사 결과 월가 이코노미스트는 대부분 내년 경제성장률을 2% 수준으로 예측했다.
미국은 대공황 이후 모두 일곱 차례 침체를 경험했다. 이 가운데 다섯 차례가 심한 경우였다. 국내총생산(GDP)이 침체 동안 평균 3% 정도 줄었다. 반면 회복 첫해 경제성장률은 7% 안팎이었다. 골이 깊은 만큼 산도 높았던 것이다. 이번 침체 동안 GDP는 3~3.5% 정도 감소할 전망이다.
하지만 미 금융회사.가계의 부실화가 대공황 이후 최악이어서 내년 성장률이 2%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로이터통신의 설문 조사 결과 월가 이코노미스트는 대부분 내년 6월 이후에나 미 중앙은행이 출구전략(통화 환수)을 본격적으로 할 것으로 전망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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