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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금붙이·빠른걸음으로 출세한 이용익, 민족의 긴 미래 보고 학교 세우다

조선왕조 때 아이들이 부르며 놀던 '승경가'. 권력의 실재에 따라 벼슬자리의 높낮이를 매긴 옛 동요는 세태를 잘 반영한다. "원님 위에 감사/감사 위에 참판/참판 위에 판서/판서 위에 삼정승/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 모화사상이 사회 저류에 흐르던 세도정권 시절.

임진왜란 때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명 신종을 제사 지내던 만동묘 묘지기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 땅의 임금이 황제가 되자 아이들은 "만동묘지기 위에 금송아지 대감"을 이어 불렀다. 그때 '금송아지 대감'은 임금의 호주머니 돈을 떡 주무르듯 주무른 내장원경 이용익(사진.1854~1907)이었다.

그가 출세가도에 오르게 된 연유를 1930년 7월호 '삼천리'는 이렇게 전한다. "그는 갑산금광에서 송아지만한 금덩이를 태황제와 명성황후에게 여러 개 바쳤고 또 황후가 대원군 세력에 쫓기어 한밤중에 향리 여주로 몸을 감출 때 다리 힘이 절륜한 그가 나는 새와 같이 황후의 몸을 안고서 하루에 천리를 갔다."

평안도 사람과 함경도 사람은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에 오를 수 없던 시절. 함북 명천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금붙이와 빠른 걸음을 사다리 삼아 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청렴하고 재간이 있었다.

도포 자락이 해진 것을 입고 다녔다." "개인적 욕심 때문에 돈을 탐하는 일이 없는 매우 질소한 인물이자 고종에게 유일무이의 충신이었다." 황현과 하야시 일본공사의 인물평처럼 사복을 채우지 않았고 충성심이 강했기에 1904년 그는 왕실 재정을 맡는 내장원경에 더해 나라의 재정운영권과 군권까지 손아귀에 넣은 탁지부 대신과 군부대신을 겸한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에 올랐다.

이용익은 냉엄한 국제정치의 판세를 잘못 읽고 남의 힘에 기대 생존하려는 잘못을 범했다.

"열강으로부터 보장받지 못한 조약이란 쓸모 없는 것이라는 점을 귀하는 모르십니까? 만약 귀국이 스스로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왜 당신들을 지켜주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우리가 중립적이라는 사실과 우리의 중립이 존중되기를 바란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약속을 했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 되어 줄 겁니다." 러일전쟁이 터지기 직전 그가 매켄지와 나눈 대화는 그때 대한제국이 왜 망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1905년 보성전문학교를 세워 민족의 미래에 대비하려 한 혜안은 빛났다. 이준에 앞서 헤이그로 가려 했던 그는 1907년 "학교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교육해 국권을 회복하시라"는 상소를 남기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숨을 거두었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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