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 '원숭이'로 조롱받았던 다윈, 승패의 관건은 도덕성이었다
올해는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150년이 되는 해다. 다윈은 이 책에서 '인간과 원숭이의 관계'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이를 분명히 밝힌 것은 11년 뒤 출간한 '인간의 유래'에서였다. 그러나 '종의 기원'을 읽은 대중은 인간이 원숭이의 사촌이라는 함의를 일찌감치 눈치챘다.'종의 기원'에서 다윈이 주장한 것은 분명 '원숭이 이론'이었다(그림은 당시 언론의 풍자화로 다윈과 원숭이가 함께 손거울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닐 만큼 다윈의 충직한 후배 동료였던 토머스 헉슬리와 성공회 사제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 사이에 벌어진 '옥스퍼드 논쟁'의 핵심이 되었다.
1860년 6월 30일 옥스퍼드대에서 윌버포스와 헉슬리가 한자리에 섰다. 교리 토론에 능했다는 뜻에서 '미꾸라지 샘(Soapy Sam)'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윌버포스는 헉슬리에게 물었다.
'당신이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조상은 할아버지 쪽입니까 아니면 할머니 쪽입니까?' 곳곳에서 웃음이 터지자 헉슬리는 당당하게 '중요한 과학 토론을 단지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자신의 재능을 쓰려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삼겠습니다'라고 되받아쳤다.
이것은 다윈 지지자들이 승리를 거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 상징적인 에피소드다. 다윈 지지자들이 승리를 거둔 이유는 물론 그들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또한 그들이 이른바 명망가들보다 도덕성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적 보수성이 팽배했던 당시 영국 사회에서 불신앙은 '부도덕' 내지는 '하층계급의 급진주의'와 동일시되었다. 그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집요한 논법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력을 '빨갱이'로 낙인 찍던 독재 체제의 논법과도 흡사하다.
다윈.헉슬리 같은 빅토리아 시대의 불가지론자들이 흠잡을 데 없는 가문 출신의 젠틀맨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더 높은 도덕성을 견지함으로써 형세를 반전시켰다. '증거 없이 믿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었다.
이념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우리 사회도 궁극적인 승리는 '더 높은 도덕성'을 확보한 세력에게 돌아갈 것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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