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 조선말기 정치 변동 따라 달력도 양력·음력 뒤바꿔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을 따라 배우려 했던 이들은 개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서구 열강과 같은 시간체계를 세우는 시간의 문명화를 꿈꿀 수 없었다."정삭(책력)을 바꿔 태양력을 쓰되 1895년 11월17일을 1896년 1월1일로 삼으라."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으로 중국의 종주권이 부정된 1895년 9월9일 양력을 쓸 것을 명하는 조칙이 내려졌다. "1896년부터 연호를 세우되 일세일원으로 제정하라." 양력 시행과 함께 채택된 건양 연호는 근대를 향한 꿈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일어난 아관파천으로 개력을 주도한 친일 개화파가 몰락하자 정부는 국가 기념일과 제사의 택일을 다시 음력을 따르도록 되돌렸다.
결국 이 땅의 사람들은 음력과 양력이 경합하는 독특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했다. 설빔 차림의 사진 속 어린이들 뒤에 보이는 '입춘대길'과 '건양다경(건양의 치세에 경사가 많이 있으라)'의 입춘방은 전통과 근대의 시간이 충돌하던 그때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한 세기 전 우리는 시간의 경쟁에서 졌다. 해방 직후 "학교종이 땡땡땡"을 부르며 자란 이들은 허비한 근대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바쁘다 바빠'와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질주했다.
속도와의 전쟁을 멈추고 느림의 미학을 되찾고 싶은 오늘.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자연에 순응하는 목가적 시간을 노래한 옛 시조가 마음에 다가온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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