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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영국 자유당의 사회개혁 중산층 외면으로 '흔들'

1900년대 초 당시 집권당이었던 보수당은 몇몇 뜻있는 개혁을 이룩했다. 그러나 1905년경 런던의 이스트엔드에서 자선단체의 구호품을 기다리는 부두 노동자 자녀들(사진)의 옷차림과 표정에서 알 수 있듯 개혁은 엄청난 소득불평등 하층민의 빈곤 노인.무직자.병약자의 고통 불결한 주거 등의 문제를 그대로 방치했다.

그 결과 1906년 1월 선거에서 영국 자유당은 유례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보수당이 157석 자유당은 377석을 얻었다. 이 선거로 17년간의 보수당 지배가 끝났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1837~1901)에는 빈곤을 당사자들의 개인적 결함으로 돌리는 풍조가 일반적이었고 보수당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 집권한 자유당은 사회적 평등에 좀 더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실업.보건.주택.교육 등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공정한 분배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새로운 흐름을 '신자유주의'로 불렀다. 70년대 시카고 학파의 '신자유주의'와 이름은 같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그 결과 1908년 노령연금법안 등이 실행돼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개혁은 급격한 재정확대를 가져왔고 늘어난 재정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1909년 혁명적이라 할 만한 대규모 예산을 의회에 상정했다. '인민예산'이라 불린 이 예산안은 귀족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부담은 대부분 부유층에 돌아가게 되었다. 보수당 일각에서는 "이것은 예산이 아니라 혁명이다"라고 말했다. 가까스로 하원을 통과한 예산안은 상원에서 걸렸다. 상원 귀족들이 이 예산안을 '부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350대75로 부결시켰다.

자유당은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에게 심판을 맡겼다. 1910년 1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자유당은 승리는 했지만 보수당보다 2석 많은 27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에게는 환영받았지만 중간계급을 자유당에서 떨어져 나가게 했던 것이다. 1906년 선거는 '비국교도=자유당' '국교도=보수당'으로 종교가 좌우했지만 1910년 선거는 계급이 주된 동력이었다. 과거 비국교도라는 이유로 자유당을 지지했던 중간계급이 이번엔 보수당을 선택한 것이다. 중간계급의 노동자 외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그러나 지역감정이 '종교'처럼 영향력을 발휘하는 우리에게는 '계급'이 주된 동력이었던 100년 전 영국 정치가 타산지석으로 다가온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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