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 조국보다 한국 더 사랑한 베델, '한민족 구하라' 유언 남기다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이방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올해는 그가 서른일곱의 길지 않은 삶을 마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그는 러.일전쟁이 터져 왕조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던 1904년 3월 영국 신문 '데일리 크로니클'의 통신원으로 이 땅을 밟았다.
"조선의 실정을 직접 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표를 던진 그는 양기탁과 손잡고 자신의 신문을 찍어냈다. 1904년 7월 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는 나라가 망하는 1910년 그날까지 여섯 해 동안 일본 침략하 조선의 실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는 신문의 지면은 일제의 탄압과 검열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의 무풍 지대였다. 박은식.신채호.안창호 같은 당대의 논객들은 그를 울타리 삼아 민족의 목탁으로 마음껏 울 수 있었다. 헤이그 밀사의 구국 활동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친일파 스티븐스 응징 등 저항 운동에 대한 보도는 의병들의 가슴에 구국 투쟁의 불씨도 댕겼다. 또한 이 신문은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점이자 신민회와 같은 항일 비밀결사의 기관지 역할도 했다.
눈엣가시처럼 껄끄러운 그를 쫓아내기 위해 통감부는 영국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그는 1907년 10월과 이듬해 6월 두 차례나 재판정에 섰다. 두 번째 재판에서 3주 금고형을 선고받은 그는 상하이로 압송되었다. 형기를 마친 뒤 1909년 5월 1일 그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그는 열여섯부터 서른둘까지 16년을 일본에서 살았다.
그러나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해 한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이 웅변하듯 5년 남짓 지낸 한국을 마음속 깊이 담았다. 스물다섯 되던 해 일본 고베에서 찍은 그의 모습이 살갑게 다가선다(사진=베델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베델처럼 이 땅에 살며 가까이에서 한국인을 접한 몇몇 서양인은 일본의 선전이 왜곡된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진보의 일본과 퇴보의 한국'. 서구 주류 사회의 대다수 인사들은 문명과 야만 합리와 비합리 발전과 정체 같은 이항 대립의 일그러진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한국이라는 자그마한 보트가 가라앉지 않으려면 반드시 일본이 견인해야 한다." 미국인 데네트 타일러의 독설은 그때 서양인들 열 중 아홉 이상이 품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저민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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