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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역사와 기묘한 인연···링컨 비서는 케네디, 케네디 비서는 링컨

미국 대통령은 곧 미국의 역사다. 워싱턴·링컨·케네디 등 한국의 위인전에도 빠지지 않는 미국 대통령들을 알아보자.

■ 초대 대통령 워싱턴 유일한 100% 득표율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789년 선거인단에 의해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됐고 1792년에도 만장일치로 재선됐다. 미국 대통령사에서 유일한 100% 득표율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고안된 대통령이란 자리가 어떤 역할과 권한을 가지는지를 스스로 정해야 했다.

그는 국정을 최종 결정하기 전엔 항상 각료와 토론을 거치도록 해 민주적 의사 결정 전통을 만들었다. 워싱턴은 유럽 강대국인 영국.프랑스의 주도권 다툼 사이에서 중립과 불간섭 정책을 폈다. 또 전쟁을 결정할 때는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어떤 세력과의 항구적인 동맹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민주.공화당 지지기반 100여 년 만에 뒤바뀌어

민주당과 공화당이 처음부터 존재한 건 아니다. 하지만 2개 당파의 경쟁과 대립은 건국 초기부터 미국의 오랜 전통이었다.

초대 워싱턴과 2대 존 애덤스는 '연방파'로 불렸다. 주(state)들의 연합체인 미합중국을 건설한 이들은 연방정부의 이익을 우선하는 중앙집권제를 추구했다. 연방파의 배경엔 산업자본가들이 있었다.

반대편엔 주정부의 자치를 중시하는 '공화파'가 농장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공화파인 3대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내 최초의 정당인 '민주공화당'(민주당의 전신)을 세워 대통령에 취임했다. 두 세력은 외교정책에서도 친영국-친프랑스로 맞섰다.

이후 연방파는 몰락했고 민주공화당은 6대 존 퀸시 애덤스까지 네 번 연속 대통령을 배출했다. 한동안 대선은 민주공화당의 '집안싸움'이었다. 서민적이고 고집이 셌던 7대 앤드루 잭슨이 당선되자 민주공화당은 잭슨파와 반잭슨파로 분열됐다.

잭슨은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꿨고 반대파는 '휘그당'을 만들었다. 휘그당은 주로 북부 공업 지역의 지지를 받아 윌리엄 해리슨(9대)에서 밀러드 필모어(13대)까지 4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19세기 중반 한층 격렬해진 노예제 논쟁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휘그당을 몰락시켰고 노예제 반대론자로 뭉친 '공화당'이 부상했다. 민주당 출신의 프랭클린 피어스(14대)와 제임스 뷰캐넌(15대)이 노예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자 북부의 유권자들은 최초로 공화당 출신인 16대 에이브러햄 링컨을 선택했다.

이후 북부의 내전 승리로 공화당은 21대 체스터 아서까지 6명의 대통령을 연속 배출했다. 민주당은 28대 우드로 윌슨이 당선될 때까지 스티븐 클리블랜드(22 24대) 한 명의 대통령만 배출하는 암흑기를 보냈다.

윌슨은 내전 이후 최초의 남부 출신 대통령이었다. 그는 연방정부의 권리를 옹호하고 진보적인 정책으로 '민주당=진보'라는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민주당)가 대공황을 성공적으로 진정시킴에 따라 민주당은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간 공화당의 텃밭이었던 흑인 등 소수자들이 뉴딜정책 덕분에 민주당 지지로 돌아섰다. 이후 민주당은 존 F 케네디(35대) 린든 존슨(36대) 등이 인종 평등 정책을 추구하며 진보 성향을 굳혔다.

공화당은 신냉전을 이끌고(40대 로널드 레이건) 감세 정책을 주도(43대 조지 W 부시 등)하며 보수적 색깔을 강화했다. 내전 때 민주당을 분신처럼 여겼던 보수 성향의 남부 주민들은 공화당 지지세력이 됐다. 100여 년 만에 양당의 지지 기반이 정반대로 바뀐 셈이다.

■ 무능한 대통령 대부분 위대한 대통령 앞뒤로 재임

미국 학계와 언론은 여러 차례 자신들의 대통령에게 순위를 매겨 왔다. 거의 항상 워싱턴-링컨-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3위를 차지했다. 반면 밀러드 필모어(13대) 프랭클린 피어스(14대) 제임스 뷰캐넌(15대) 앤드루 존슨(17대) 워런 하딩(29대) 허버트 후버(31대) 지미 카터(39대) 조지 H W 부시(41대) 등은 대부분 순위에서 하위권을 면치 못했다.

두 부류의 차이는 무엇일까. 상위권 세 대통령은 모두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을 치렀다. 루스벨트는 초유의 대공황을 거쳤다. 모두 용기와 현명한 결단으로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했다. 그들이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이런 점에선 행운이었다.

반면 무능한 지도자로 낙인 찍힌 대통령들은 너무 평화로운 시대에 대통령이 됐거나 '성공한 대통령'의 들러리였다.

■ 43명 중 26명이 변호사 출신… 장군도 3명

대통령의 전직 43명의 대통령 중 26명이 변호사 출신이다(오바마는 44대 대통령이지만 스티븐 G 클리브랜드가 22.24대 두 차례 재임했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 총 수는 43명이다).

15명이 주지사 경력을 보유한 것을 비롯 대부분이 상.하원의원 등 정치인으로 경력을 쌓았다. 예외는 재커리 테일러(12대) 율리시스 그랜트(18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 세 명인데 각각 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장군이었다. 14명은 부통령을 지낸 후 대통령이 됐다.

젊은 대통령 늙은 대통령 흔히 케네디(44세)가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1901년 당시 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가 피살되자 43세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케네디는 선거로 뽑힌 가장 젊은 대통령이다. 레이건은 역대 가장 노령인 70세에 대통령에 올라 78세까지 재임했다.

한 달짜리 대통령 12년짜리 대통령 9대 해리슨은 눈보라 속에서 1시간45분간이나 취임연설을 한 후 폐렴으로 앓아누워 31일 만에 사망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재선까지만 출마한다는 전통을 깨고 4선에 성공해 12년1개월8일간 재임했다.

조손 대통령 부자 대통령 6대 존 퀸시 애덤스는 2대 존 애덤스의 아들이다. 최단임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의 손자 벤저민 해리슨은 2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12촌 형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아버지 조지 H W 부시가 물러난 지 8년 만에 대통령에 올랐다. 힐러리 클린턴이 지난해 대선의 승자가 됐다면 미국 41~44대 대통령은 부시-클린턴-부시-클린턴이 될 뻔했다.

대통령 이후 일부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의원으로 활동했다. 존 퀸시 애덤스는 대통령 퇴임 후 18년 동안 연방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앞장서서 정부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공화당 소속으로 두 차례 임기를 마친 후 4년 만에 진보당을 창당해 다시 대선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변호사 출신의 윌리엄 태프트(27대)는 퇴임 후 대법원장에 임명돼 10년간 봉직했다.

링컨과 케네디의 기묘한 인연 이들은 100년 간격으로 하원의원(1846 1946년)과 대통령(1860 1960년)에 당선됐다. 둘 다 부인과 동석한 자리에서 뒤통수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

링컨 암살범은 극장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창고에서 잡혔고 케네디 암살범은 창고에서 총을 쏜 후 극장에서 잡혔다. 케네디란 이름을 가진 링컨의 비서와 링컨이란 이름의 케네디 비서는 모두 암살당할 장소에 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둘 다 '존슨'이란 이름의 부통령(앤드루 존슨.린든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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