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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모하며

차종환/전 한미인권연구소장

1924년 이 땅에 오셨다가 2009년 85세로 생을 마치셨다는 밤 늦은 시간에 들려온 비보에 비통함으로 잠을 이룰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문제를 위해 투쟁하시다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당하시면서도 정의를 위해 매진하셨습니다.

또한 통일 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종식과 민주주의의 정착 한반도 평화조성에 크게 이바지 하셨다는 평가를 받고 그 공로로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셨습니다. 후광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이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신지 1개월 이상 사선을 넘나드시다가 끝끝내 회복을 못하시고 돌아가시다니 너무나 안타깝고 슬픔니다.

선생님은 1961년 58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신후 6대(63년) 7대(67년) 8대(71년)13대(88년) 14대(92년)국회의원으로 원내활동을 하셨습니다.

71년 신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시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패하신후 87년 92년 거듭 낙선되시었습니다. 97년 마침내 한나랑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셨습니다.

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혀 투옥과 연금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당하시다가 인동초처럼 피어나셨습니다.

73년에는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납치되어 수장을 당할 뻔 하셨고 유신 이래 5년반의 투옥 3년여의 망명 6년반의 가택연금으로 신체의 자유마저 누릴 수 없었던 선생님은 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의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 때 학생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되신 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사전 지시하셨다는 내란음모혐의로 80년 7월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신 선생님은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여 미국으로 오셨습니다. 83년 한미 인권문제 연구소를 창설하셨고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민주화 항쟁을 이끄셨습니다.

1987년 11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햐셨으나 노태우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시셨습니다. 그후 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패하시고 95년에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97년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야권공조를 앞세워 97년에 건국 이후 3전 4기 끝에 드디어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셨습니다.

특히 대통령 재임기간 6.25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IMF)를 극복하시고 2000년 6월 15일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시고 남북화해 협력시대를 여셨습니다.

선생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대통령 임기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퇴임 후에도 대북비밀송금과 현실정치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기도 하셨습니다.

남북간에 경색된 분위기가 조금 풀릴듯 보이는 요즘 이제부터 대통령님의 크신 역할을 기대하던 이 시점에 영면의 소식을 듣고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진정키 어렵습니다.

허나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평화통일을 이룩하는데 크게 도와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이곳에 남은 우리들 선생님의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편히 쉬십시오. 이곳에 남겨놓으신 대통령님의 업적은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의 역사 속에서 길이 길이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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