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김대중] '망명의 설움, 꽃으로 달래'…문동환 전 평민당 부총재
평민당 부총재로, 망명시절에는 후원자로 DJ와 정치적 동반자였던 문동환 목사. 문 목사는 고인을 “정치와 통일, 꽃가꾸기가 낙이었던 분” 이라고 회고했다. 다음은 문 목사의 회고담.-DJ의 사망 소식을 처음 듣고 어땠나.
"2년 전 만남이 마지막이었다. 평생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간절히 바랬던 분이다. 어느 정도 꿈을 이루었다고 보는데 세계화 문제 때문에 빈부화 격차 해소 못하시고 가신 게 마음 아프다."
-처음 DJ를 만났던 때는.
"1969년 3선 개헌 당시 장충단 공원연설을 들으면서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했다. 1~2년 뒤 기독교 정치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해서 만났고, 1977년 같이 옥고를 치렀다.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내가 세계교회협의회 모임 때문에 해외에 있었는데 한국 못 들어가고, 워싱턴DC에서 작은 교회 차렸다. DJ가 82년 미국으로 망명오면서 2년 동안 아주 가깝게 지냈다."
-기억남는 장면 있다면.
"책을 출판하면서 머릿글을 부탁해 내가 ‘신들린 김대중’이란 글을 썼다. 이 양반은 24시간 정치 밖에 생각 안한다. 놀란 것은 호텔에 있으면서 작은 화분에 꽃을 길렀다. 강한 정치인이 꽃을 기르는 것은 대조적인 것 아닌가. 왜 꽃을 사랑하냐고 물었더니 광주항쟁으로 감옥에 갔을 때 화단에서 꽃 기르는 것은 허가했다고 했다. 싹이 나서 자라는 것 보면서 생명과 기가 통했다는 것이다."
-평민당 부총재로 DJ와 정치를 함께 했는데.
"통일에 대해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형(문익환 목사)이 아닌 날 택하더라. 정치인은 보는 눈도 달랐던 것 같다. 목사가 정계 진출한 것을 놓고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난 DJ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망할 것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넬슨 만델라 같은 인물을 떠올리며 DJ도 그런 ‘지사’가 되어 주길 바랬지만 그는 정치인이었다. DJ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운동권 사람들을 안 썼다. DJ는 정치할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그들은 정치할 줄 몰랐다."
강이종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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