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 베이스캠프…재임 때 두 차례 방문
김 전 대통령, 뉴욕 한인사회와 각별한 인연
미국의 DJ 인맥이 주로 호남 출신 인사들로 축소됐지만 한때 반독재 운동 세력은 사실상 DJ가 평정하다시피 했다. 특히 미국 망명생활 2년3개월 동안 폭넓은 지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민주화 인맥을 구축했다.
◇ 뉴욕인맥=뉴욕 동포사회에 동교동 가신 그룹에 버금가는 조직과 인맥이 형성된 것은 1982년 DJ가 미국에 망명한 이후부터. DJ는 망명 기간에 이근팔씨가 개인적으로 유지하던 자신의 워싱턴 사무실을 확대 개편하면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만들었다.
인권문제연구소는 13개 지부가 운영됐는데 뉴욕에서는 이종인, 안병선, 김진옥씨 등이 지부장을 역임했다. 국민회의 정동채 비서실장, 박지원 기조실장, 김경재 의원, 유종근 전북도지사 등이 당시 DJ 측근 그룹을 형성했다.
◇ 망명시절=DJ는 1982~85년 미국 망명 시절 뉴욕과 워싱턴DC를 오가면서 뉴욕 동포들과 교류했다. 굴곡 많았던 고인의 정치 역정에서 고비고비마다 뉴욕 한인들의 힘이 큰 역할을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신문을 만들던 김경재 전 국회의원,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한 박지원 국회의원 등이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1983년 설립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미 전역에 지부를 두고 고인을 적극 지원하는 후원 단체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85년 2월 7일 귀국길에 오르기 전날 뉴욕에서 지인들을 만나 작별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박윤용 한인권익신장위원회장은 “10여명의 지인이 퀸즈 포리스트힐에 함께 모였는데 김 전 대통령이 ‘동지’라는 표현을 사용해 아직도 기억이 또렸하다”고 회고했다.
◇ 야권 지도자=1995년 정계에 복귀한 김 전 대통령이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DJP 연대’의 불꽃을 올린 곳도 뉴욕이었다.
비전 21을 중심으로 김대중-김종필 연대를 통한 ‘준비된 대통령’을 내세워 그해 12월 대선에서 성공했다. 뉴욕의 비전 21 회원들은 97년 대선 당시 한국에서 직접 지원 유세를 벌이면서 한국 정계에 해외 동포사회의 수평적 정권 교체 열망을 전달하는데 한 몫을 했다.
◇ 대통령=고인은 대통령 재임시 뉴욕을 2차례 방문했다. 1999년 필라델피아시가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 수상, 2000년 UN 밀레니엄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UN 밀레니엄 정상회의는 남북 정상회담 직후였던 탓에 한반도 통일을 위한 뉴욕 동포들의 역할을 적극 주문했었다.
퇴임 후인 2007년 9월 코리아소사이어티 초청으로 뉴욕을 방문해 강연한 것이 뉴욕 동포사회와 마지막 만남으로 남았다.
미국 망명 일지
▶83년 1월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정착
▶83년 2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창설
▶83년 5월 에모리대 명예 법학박사 학위
▶83년 6월 워싱턴,뉴욕 등에서 김영삼 단식투쟁 지원 데모
▶84년 1월 뉴욕 유니온신학대학교 국제위원회 고문
▶84년 12월 전두환 대통령에게 귀국 서한 발송
▶85년 2월 망명 2년3개월만에 귀국
안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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