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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이름이 두 개인 아들

아들과 함께 전자 제품 매장 ‘베스트 바이(Best Buy)’에 갔을 때, 금발의 백인 여학생이 아들을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했다. “하이(Hi), 대니(Danny)!” 아들의 학교 친구다. 아들은 반가운 얼굴로 그 아이와 대화를 한다.

조금 전까지 엄마와 우리말로 수다를 떨던 아들은 완전한 한국 사람이었는데, 영어를 하면서 친구와 떠드는 아들은 몸짓까지도 미국 사람같다. 아들이 이렇게 친구와 있을 때면 우리 아들 ‘다은’이가 아니라, 그 아이의 친구 ‘대니’라는 생각이 든다.

17년 전 아들이 태어났을 때, 아들의 출생이 하나님의 많은 은혜이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많은 은혜가 있기를 바라면서 다은(多恩)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아내와 나였다. 딸이 태어나기를 은근히 바랐던 우리는 그 이름을 그냥 아들에게 주었다.

사람들이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많은 은혜가 있기를 자동으로(?) 축복하는 장치가 되는 셈이어서 그 이름을 정하는데 아들이고 딸이고를 그리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들을 부를 때면 아들을 축복하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름대로 아들은 많은 은혜를 받았고, 앞으로도 많은 은혜를 받을 것과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것을 지금도 부모로서 믿고 바란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얼마 안되어 미국인들이 아들의 이름을 바르게 발음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은’자를 바르게 발음하는 미국인들이 드물었고, 하더라도 매우 힘들게 발음을 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아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은 미국인들이 부르기에 편한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많이 쓰는 이름들 중에서 아들에게 어떤 이름을 쓰게 할 지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름들의 의미와 유래를 많이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들의 이름을 정하게 되었다.

아들의 이름을 ‘다은이’로부터 바꾸어 ‘다으니’로 써보니 그와 유사한 이름이 보였는데, 그것이 ‘대니’였다. 영화 등에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대니’는 아들의 이름으로 쓰기에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다은이’가 ‘대니’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발음 사이의 유사점 때문이었다. 그 후, 아들은 학교에서 ‘대니’로 불리면서 ‘대니’가 되었다.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모두 아들을 ‘대니’로 불렀고, 아들도 자기 이름을 그렇게 썼다.

집에서는 ‘다은’이로 불리우다가 밖에서는 ‘대니’가 되니 혼돈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조금도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 10년이 되었다.

살아오는 동안 단 하나의 이름만을 써 온 내가 두 개의 이름을 쓰는 아들을 보는 것은 재미있다. 친구들 사이의 별명이 아니라면, 특수 임무를 가진 정보원이나 자기를 숨길 목적으로 가명을 쓰는 사람들 이외에 이름을 두 개 가진 사람은 드물다.

한국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개인의 신분이나 직위만 바뀌어도 새 호칭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혼돈을 한다. 원하던 직위에 올라도 사람들이 자기를 부르는 새 호칭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옛 호칭은 곧 잊어버린다. 우리는 대개 한가지 이름으로, 한가지 호칭으로 불리우며 산다. 그런데 아들은 누군가가 자기를 부를 때, 우리말 이름으로 부르거나 영어 이름으로 부르거나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반응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흥미롭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나 호칭을 동시에 몇 개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자기가 속해서 생활하는 집단이나 사회의 수만큼일 것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아들을 정작 보면 신기할 때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아들이 속한 집단의 수 때문이 아니라, 그 집단의 문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다은’이라고 불리우는 곳과 ‘대니’라고 불리우는 곳의 문화가 다르고, 아들의 행동도 따라서 다른 것을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것이다. 군대 시절, 전투비행대대에서는 늘 완전무결을 강조하던 까다로운 조종사가 기지교회에서는 ‘집사’로불리우면서 한없이 친절하고 관용적이었을 때도 나는 비슷한 감정을 가졌었다.

내가 아들처럼 미국 문화를 몸에 완전히 익히지 않는 한, 영어 이름을 쓰면서 살아가는 아들은 내 눈에 계속 각별하게 보일 것 같다. 개인의 이름은 이름을 넘어 한 사람의 문화 정체성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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