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 '철혈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 세계 최초로 사회보장제 도입
1898년 7월30일 독일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비스마르크(사진)가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사회정책을 실시해 독일을 복지국가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1871년 통일 직후 독일제국은 한동안 호황을 누렸지만 1873년부터 시작된 수년간의 경제 불황으로 주가의 대폭락 수많은 기업의 도산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겪었다.
급속한 공업화의 결과 1871년 인구의 20%를 점유했던 노동자의 수는 1880년대 초 인구의 25%로 늘어났다. 노동자들은 장기 불황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이는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세력이 급증하는 요인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78년 10월21일 새로이 구성된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을 통과시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은 2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890년까지 갱신.유지됐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도 사회주의 지지도는 계속 높아지기만 했다.
이런 현실에서 비스마르크는 법을 통한 강압만이 사회주의에 대한 완벽한 대응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즉 국가가 적절한 사회정책을 펼치고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한다면 노동자들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1881년 11월 비스마르크는 제국의회에서 사회입법의 취지를 담은 황제교서를 낭독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보호 및 부양 정책을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그 후 약 10년간 광범위한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위험한'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한편 '선량한' 노동자들을 포섭함으로써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권위주의적 사회정책이었다. 이른바 '사탕과 회초리' 정책이다.
물론 이런 권위주의적 정책으로 참다운 국민 통합이 이뤄질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위대한 전환'이었고 그 후 각국 사회보험제도의 본보기가 되었다.
1884년 오스트리아에 이어 1893년에 이탈리아 1901년 스웨덴.네덜란드 등지에 이와 유사한 제도가 등장했다.
지난 5월30일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상위 20% 소득과 하위 20% 소득의 격차가 2000년 전국 가구 소득 통계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가장 컸다. 하지만 우리나라 복지지출 규모는 GDP의 9% 안팎으로 OECD 평균 21%에 비해 12%포인트 낮다.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의 사회정책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없을까.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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