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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반세기 전엔 한 방에 여덟 식구···'파리의 지붕 밑' 심각한 주택난

1930년대 초 프랑스 인구의 상당수는 단칸방 또는 서로 통하는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살았다. 두 칸인 경우 한 칸은 부엌이었다. 39년까지 거의 모든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지만 상수도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공동 우물을 많이 이용했다. 욕실은 당연히 없었고 개수대 위에 찬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혼자'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변을 보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도 가족에게 보여야 했다. 그게 부끄러우면 돌아앉으라고 부탁했다. 광산 사택에서는 거실에 나무 함지박을 들여놓고 부인이 난로 위에 물을 끓이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온 광부는 거실에서 부인의 도움으로 몸을 씻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20세기 전반 내내 지속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택이 부족했던 것이다. 양차대전 사이(1919~1940)에 지어진 주택은 200만 채에 불과했다.

세입자 보호와 물가상승 억제를 위해 제1차 세계대전 후 채택한 임대료 규제정책으로 임대료가 너무 낮은 수준에 묶이는 바람에 지주들은 임대주택 건설에 흥미를 잃었다.

53년부터 6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주택 사정은 정부의 강력한 주도로 놀랍게 좋아졌다. 53년에 지어진 신규 주택은 10만 채를 넘었고 59년에는 30만 채 65년에는 40만 채가 건설되었다.

이어 민간자본도 주택 건설에 참여했다. 72~75년에는 매년 50만 채 이상이 건설되었다. 이 4년 동안 건설된 물량이 19~40년에 지어진 물량보다 많았다. 집이 없던 수백만 프랑스 가족들에게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현대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60년에도 비좁은 주거공간에서 사는 서민들은 여전히 있었다(사진). 보통 한 침대에 세 명씩 잠을 잤다.

방에는 빨래가 널렸고 옷장 위에는 라디오가 놓여 있다. 창문 옆 구석에는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 모습이다. '패션과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화려한 이미지 뒤에 감춰진 서민들의 삶은 그리 풍족지 않았다. 물론 그 시절 우리는 훨씬 더 힘겨웠지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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