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CEO 열전-1] 미국서 연간 3000만개 파는 '모자왕' 소네트/플렉스피트 CEO 조병태 회장
'아이디어·열정 있으면 세상은 노다지'
사업초기엔 실패의 연속…수십만달러 빚더미 올라
광고용 모자로 극적 재기…'원 사이즈' 개발 빅 히트
-시장조사에 열을 올려라. 리서치는 생명이다.
-자신감을 가져라. 모든지 하면 된다.
-포기하지 말라. 죽기 살기로 매달리면 실패란 없다.
세계한인무역협회 증경회장이기도 한 조병태 회장은 지난 23일~25일 LA에서 열린 '제6회 차세대 무역스쿨'에 참가한 무역 사관생도들에게 그의 '30년 스토리'를 들려줬다.
참가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1시간여 동안 진행된 '모자왕' 조병태의 '모자에 미친 이야기'에 빨려들었다. 그의 '성공 스토리'를 지면에 옮긴다.
#1. 첫 주문이 들어오다= 한국에서 잘 나가던 핸드볼 선수였던 그는 새로운 도전을 꿈꿨다. 1974년 유풍실업에 들어가 모자사업을 배운 그는 1975년 4월 28살의 나이에 뉴욕에 지사장으로 떨어졌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모자 샘플을 가지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시장조사를 했다. 바이어 리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시에는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오로지 옐로페이지만을 가지고 바이어를 찾아나섰다.
영어로 간단한 인사 정도 밖에 하지 못한 그는 그래도 무턱대고 전화를 돌렸다. 하루 수십통. 대화가 될 턱이 없었다. "오전9시에 가겠다" "오전11시에 미팅을 하자"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고 나름대로 스케줄을 짜 무작정 하루 5곳씩 바이어를 찾아갔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바이어를 만난지 6개월. 그동안 500개가 넘는 업체를 방문했지만 주문은 한 건도 건지지 못했다.
그러다 6개월동안 12번은 만난 바이어에게 첫 주문이 들어왔다. 모자 5000개 납품 20만달러짜리 거래였다. 드디어 비즈니스가 시작됐다.
#2. 영주권을 맡기다= 하지만 쿼터가 걸림돌이었다. 노-쿼터 제품을 찾았다. 가죽이었다. 가죽 공장에서 버리는 가죽 조각을 수거해 가죽 패치 모자를 만들라고 인건비가 싼 한국 달동네에 보냈다. 모자 생산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리고 물건이 뉴욕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작 물건을 받은 바이어의 거칠게 항의하는 전화를 받았다. 가죽 모자에 곰팡이가 생긴 것. 당시 운송기간은 45일 정도. 운송기간동안 가죽 패치 제작에 사용한 풀에서 곰팡이가 자란 것이다.
성공하는 줄 알았는데 실패였다. 20만달러 빚더미에 앉았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그는 바이어에게 영주권을 맡겼다. "반드시 빚을 갚겠다"는 약속과 함께.
#3. 허드슨 강변에 서다= 가죽 모자에 실패한 그는 역시 노-쿼터 원단인 린넨에 도전했고 50만달러어치 주문을 받았다. 역시 생산과 운송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물건을 받아보니 린넨 모자는 모두 구겨져 있었다.
린넨의 쉽게 구겨지는 성질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구겨진 린넨 모자는 팔 수가 없었다. 다시 다림질을 하고서야 팔 수 있었다. 하지만 다림질을 하느라 10만달러 빚이 또 생겼다.
두번째 실패. 모자는 아닌가보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허드슨 강변에 섰다. 좌절감이 컸다. 자살을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죽자 하니 무서웠다. "그래 죽을 생각까지 했는데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해보자."
당시 그는 차가 없었다. 아니 이민와서 쭉 차가 없었다. 지하철로 다녔다. 200스퀘어피트 크기 방 1칸 아파트에 4식구가 살았다. 그 때가 그의 나이 서른. 잠은 5시간만 자기로 했다. ▷백화점을 다니고 쇼를 참관하면서 철저히 시장조사를 하자. ▷더 많은 바이어를 만나자. ▷최고 품질의 모자를 개발해보자. 각오를 다졌다. 한국에 있는 부모와 형제들의 집을 담보로 융자를 받아 다시 시작했다.
#4. 아이디어가 먹히다= 당시 광고가 넘쳤다. 하지만 아무도 모자를 광고수단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모자 앞을 광고판으로 이용해보자. 좋은 천에 프린트를 해보자. 바로 그의 첫 히트상품 ‘프린팅’ 모자다. 첫번째 클라이언트는 버드와이저였다. 버드와이저 로고를 모자 앞에 새겼다.
두번째는 말보로, GM과 포드 등 클라이언트가 늘어났다. GM과 포드는 신차가 나올 때마다 그의 모자를 통해 홍보했다. 판매는 폭발적이었다. 컨테이너가 도착하자 마자 나갔다.
그렇게 2년동안 진 빚을 갚았다. 집도 사고 자동차도 샀다. 사무실도 얻고 직원도 뽑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새로운 모자 개발에 들어갔다. 모자에 수를 놓아보자. 82년 내놓은 ‘자수’ 모자는 88년까지 인기를 끌었다. 그의 회사는 연간 1000만~20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5. 토마스 이름을 알리다= ‘토마스 C 프로모션(당시 회사 이름)’은 모자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조 회장의 영어 이름이 토마스다.
그는 쉴 줄 몰랐다. 다음으로 눈을 돌린 분야는 스포츠 모자. 먼저 야구 리그를 뚫었다. 뉴욕 양키스를 시작으로 미 전역 26개 야구팀의 모자를 납품했다. 농구, 풋볼, 아이스하키 등 각 프로 스포츠 리그 선수의 모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연 매출 1억달러를 달성했다. 모자 업계에서는 처음. 그게 1991년일이다. 1988년 설립한 도미니카 등의 공장 직원이 5000명, 뉴욕 사무실에는 50명으로 불어났다. 애틀랜타와 LA에도 세일즈 사무실을 오픈했다.
#6. 사이즈에 주목했다= 하지만 다시 위기가 왔다. 1992년 쿼터제가 폐지되면서 값싼 중국 물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그의 모자가 밀렸다. 매출이 떨어졌다. 돌파할 또다른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그는 모자 사이즈에 주목했다. 당시 모자 사이즈는 10가지. 재고 부담이 컸다. 원(one) 사이즈를 만들어보자. 고탄력의 스판덱스 소재를 사용하고 모자 뒷부분에는 머리 크기에 맞게 모자 크기를 조절하는 밴드 대신 신축성 좋은 소재를 사용하기로 한다. 특수 밴드를 모자 테두리에 댄 ‘플렉스 피트(Flex Fit)’였다.
플렉스 피트는 1994년 개발해 96년 첫 출시했다. 98년엔 특허 출원했다. 96년은 랩이 유행하던 때. 마침 랩퍼로 뜨고 있는 ‘LL 쿨 J’가 공연 때 플렉스 피트 모자를 쓰고 나왔다. 부탁한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당시 플렉스 피트 모자의 인기가 너무 높아 모자 도둑질이 극성을 부릴 정도였다.
플렉스 피트는 2년 정도 뜨겁게 달구웠다. 하지만 모자에도 유행이 있는 법. 98년쯤부터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서부 시장에서 반응이 왔다.
#7. 마침표는 없다= 남가주는 서핑, 스노보드 등 액션 스포츠 발달이 잘 된 곳. 퀵실버 등 액션 스포츠 업체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프로 스포츠에서 액션 스포츠 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겠구나. 시장을 키울 수 있겠구나. 2000년 LA에 지사를 세웠다.
사시사철 모자를 쓰는 동네. 여기가 바로 노다지구나. 서부 시장에 눈을 뜬 것이다. 그해 5월에 바로 LA인근 클레어몬트에 집을 샀다.
현재 ‘소네트/플렉스 피트’의 연간 매출액은 1억5000만달러. 그의 모자는 전 세계 안 들어가는 나라가 없다. 중국을 제외하고. 중국에 진출하면 바로 짝퉁이 나오겠지만 언젠가는 들어가야겠지.
그의 다음 야심작은 ‘210 피티드 캡(fitted cap)’이다. 플렉스 피트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돼 밴드를 없애고 원단 자체의 신축성만으로 크기를 조절하는 모자다. ‘210’은 2개로 10가지 사이즈를 커버하는 한다는 의미다. 210 피티드는 이미 모자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조병태 회장에게 ‘세상은 노다지’다. 그의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그는 샘솟는 아이디어로 또 다른 모자 특허를 준비 중이다. 그리고 그의 도전에 쉼표는 있어도 마침표는 없다.
◇조병태 회장은…
- 1946년 11월 경북 영덕 출생
- 65~69년 경희대 체육관리학과 졸업
- 69~74년 중학교 교사, 핸드볼 선수 및 코치
- 1975년 도미
- 75~76년 유풍실업 뉴욕 지사장
- 76~현재 토마스 C 프로모션, 소네트, 플렉스 피트 CEO
- 81~88년 세계핸드볼 연맹 국제심판
- 92년 전미 엘리스 아일랜드 메달 수상
- 96~98년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회장
- 98년 대한민국 대통령상 수상
- 2001년 세계한인무역인 대상 수상
이재희 기자 jhle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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