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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정쟁 격심하니 내 각제 바람직' 헌법 기초한 유진오의 선견지명

1945년 8월 15일 한국인의 정치 참여 기회가 철저하게 막혀 있던 일제 식민통치가 종언을 고했다. 미군정하 우후죽순 격으로 솟아난 정치단체마다 헌법의 제정을 위한 초안 작성에 부심하던 그때.

당시 유일무이한 헌법 전문가였던 유진오(1906~1987.사진)는 그의 능력과 식견을 해방된 조국을 위해 펼칠 기회를 얻었다. 47년 그는 법전편찬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최초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하에 실시된 총선거 결과 제헌국회가 출범하였다. 6월 3일 국회는 그를 헌법기초위원회 10명의 전문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했다.

7월 12일 만장일치로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헌법은 국회의 심의를 통과해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렸다. 유진오가 만든 초안은 90% 이상 원안대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였던 이승만의 반대에 부닥쳐 그가 꿈꾸었던 권력 구조인 내각책임제는 대통령중심제로 뒤바뀌고 말았다.

정파 간 다툼으로 국정이 난맥상을 보이고 개헌 논의가 봇물 터지듯 다시 일고 있는 오늘 '헌법의 아버지' 유진오가 남긴 고언(苦言)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나라의 격심한 정쟁의 현상으로 보아서도 이를 완화 또는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 절대로 필요하며 그와 같은 인물이 없으면 정국은 파국적 단계까지 이를 위험성이 있으므로 실제적 견지로 보아서도 우리나라의 정부 형태가 정쟁에 초연한 원수를 가질 수 있는 의원내각제도로 추이하는 것은 희구할 만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대통령제에 대한 그의 반론이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 헌정사가 증언한다. 제헌절 61주년을 맞는 오늘 내각책임제를 꿈꾼 그의 선각이 마냥 그립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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