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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 플레이스] 한인 영웅의 무게

박용필/객원 논설위원

LA 한인타운에서 뉴멕시코주 갤럽까지의 거리는 700여 마일. 멀리 떨어져 있지만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상흔이 짙게 배어있는 곳이다. '김영옥 중학교'와 '미야무라 고등학교'를 통해서다.

한국계인 김영옥과 일본계인 히로시 미야무라. 둘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2차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탈리아의 시실리섬. 대부분 일본계 2세(니세이)로 이뤄진 442부대에서 함께 싸웠다. 독일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나란히 군복을 벗은 두 사람.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자 이들은 현역으로 자원복귀해 처절한 전투의 현장에 또 다시 삶을 내맡겼다.

한국전 당시 미군병사들이 가장 갖고 싶어했던 것은 '티켓 홈'(ticket home)이었다. 심한 부상을 입게 되면 본국으로 송환돼 이를 '고향으로 갈 수 있는 티켓'이란 우스개로 불렀던 것. 오죽 전쟁에 대한 공포가 심했으면 자해행위를 해서라도 이 '티켓'을 받으려 했을까.

김영옥과 미야무라도 교전 중 중상을 입어 '티켓'의 대상이 됐으나 이를 완강히 거부 최일선에서 적과 맞닥뜨렸다.

미야무라가 포로로 잡힌 건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유엔군에 불리해질 무렵이다.

부대원들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도록 혼자 기관총을 잡고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쏴댔다. 휴전협정으로 석방된 그는 백악관에 초청돼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장군도 이 훈장을 받은 병사에게는 먼저 경례를 붙여야 한다는 군인 최고의 영예다.

그의 고향 갤럽도 미야무라를 잊지 않았다. 2007년 '미야무라 고등학교'를 신설한 것. '김영옥 중학교'보다 2년 먼저다. 두 영웅의 전설이 뒤늦게나마 살아 숨쉬게 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프리웨이 일부 구간이나 공공건물 등엔 더러 있지만 아시아계 전쟁영웅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공립학교는 미국에서 두 곳 외엔 없다.

커뮤니티의 반발도 적지 않을 뿐더러 특히 학생들에게 전쟁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까 우려해 웬만해선 군인을 학교 이름으로 채택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두 동양계 미국인을 학교의 공식명칭으로 삼은 것은 희생정신과 애국심 등 이들이 지닌 삶의 무게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 미국은 나를 낳아준 '모국'(motherland) 한국은 아버지의 나라인 '조국'(fatherland)이라며 부모에 빗대 불렀던 김영옥 대령. 14일 LA 통합교육구는 이사회에서 '김영옥 중학교 명명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그의 나라 사랑 커뮤니티 사랑이 이제야 결실을 맺게 됐다.

이날 모임엔 442부대 생존자들이 고령임에도 불구 자리를 뜨지 않은채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봤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김영옥을 '크레이지 코리언'(Crazy Korean)이라 부르며 따랐던 '니세이' 노병들. 마치 그가 살아 돌아온 듯 감회어린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도 그가 명예훈장을 받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 2000년 클린턴 대통령이 442부대 출신 20명에 이 훈장을 수여했지만 한인사회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인지 김영옥 대령은 명단에서 빠졌다.

내년은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꼭 60주년이 되는 해다. 커뮤니티와 한국정부가 힘을 모아 명예훈장 추서 캠페인을 벌이면 어떨까. 김영옥 중학교에 기념관도 하나 세우고. 이민 후배들에게 남겨진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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