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 에세이 입상작] 효부상, 못다한 며느리 노릇 내년엔 꼭···
에스더 유
LA는 지금 막 여름 더위가 시작되었어요.
그렇지만 곳곳에 형형색색 아름다운 고운 빛깔의 꽃들이 무더위를 잊게 해줍니다.
대구도 지금쯤 많이 덥겠지요. "아이구 디다"하시면서 가게에서 장사하고 계시겠네요. 많이 더워서 고생이 많으시죠. 장사도 안 되서 힘드신데. 죄송해요. 저희가 미국에 있어서 도와 드리지도 못하고….
제가 어머니 아버지의 며느리가 된 지도 벌써 7년이 흘렀네요. 정말 세월이 빠르네요. 제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진이가 6살 용선이가 4살이네요.
아이들 많이 보고 싶으시죠. 내년에 진이 아빠가 한국으로 꼭 발령이 나서 그동안 못한 며느리 노릇 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편지를 드리니까 제가 젤 첨 두 분께 원재씨랑 두려운 맘으로 인사 드리러 가던 날이 생각나네요.
미국에서 오래 자랐고 저희 집안 교육자 집안이라 장사하시며 오래 살아오신 두 분의 아들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 반대하시려고 했는데 절 보시고 며느리 삼으면 정말 좋겠다고 좋게 보아주셔서 아버님이 절 보시고 대뜸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애를 낳냐고 원재 씨한테 절 데리고 단골 한약방 가서 약 한 재 먹이라고 하셨죠.
전 너무 당황하고 부담스러워서 솔직히 두 분이 그땐 좀 이상했어요. 제 의향은 무시하시고 그냥 며느리 취급을 하셔서…. 어쨌든 얼떨결에 결혼 날짜를 등 떠밀려 잡고 아버님은 대구 시내 아시는 분 모두에게 절 데리고 다니시면서 미국에서 우리 아들이랑 결혼하러 온 예쁜 며느리라고 자랑하시며 다니셨죠.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죠. 결혼식 전날 아버님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셔서 결혼을 연기할 수는 없어서 아버님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던 외아들 결혼식에 참석 못 하셨죠. 결국 눈물의 결혼식을 올리고 식이 끝나자 마자 아버지 뵈러 응급실로 달려갔죠.
그런 우리 두 사람에게 어머니는 신혼 여행을 못 가서 어떡하냐고 걱정하시고 아버님이 빨리 의식을 되찾도록 우리 모두는 눈물로 기도했죠. 다행히 하나님이 아버지를 예전처럼 건강하게 해주셨죠.
전 아버지가 의식 찾으셔서 저의 손을 잡고 하신 그 말씀 평생 못 잊을 거에요. "아가 미안하다. 내가 주책없이 좋은 일 앞두고 맘 고생하게 해주었네. 너 결혼식 못 봤으니까 내년에 손주 하나 낳고 또 한 번 예식 올리자"하셨죠.
결국 예식은 다시 올리지 못하고 남편이 절 따라 미국에 왔지만 용선이 돌은 성대하게 했죠.
아버님이 그렇게 기다리시던 손자 손녀를 안겨드려서 조금이나마 며느리 역할 한 것 같아 위안 삼았어요.
어머니 아버지 내년에 꼭 한국에 가서 며느리 노릇 반에 반이라도 그동안 못한 것 해드리고 싶어요.
며느리가 아닌 딸로 늘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저도 두 분 시부모님이 아닌 정말 저희 부모님처럼 평생 사랑하며 살게요. 내년에 뵐 때까지 건강 챙기시고요. 장사에 너무 힘쓰지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 저의 시부모님이 되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평생토록….
어머니 아버지의 딸 에스더 올림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