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 '1000명 당 5개 꼴' 귀한전화, 지금은 휴대전화만 4500만명
1902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공중전화가 개통돼 민간에서도 전화를 쓸 수 있게 됐다. 그해 5월에는 서울과 개성 사이를 잇는 전화선이 가설됐으며 다음 해 2월에는 평양에까지 그 선로가 연장됐다.그러나 '문명의 신경망' 전화를 자력으로 놓으려던 대한제국 정부의 힘겨운 노력은 1905년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물거품이 돼버렸다.
일제 강점기에 전화는 수탈과 지배를 위한 침략과 사찰의 도구였지만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문명의 이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모자라 전화 보유에 있어 민족적 격차는 너무도 컸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1일자 기사는 일제 식민지하 일그러진 '발전'의 서글픈 사연을 잘 들려준다.
'조선인의 서울인가 일본인의 서울인가. 문명의 이기인 전화로 보아도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1000인마다 일본인은 60인 다른 외국인은 37인이 전화를 가졌는데 서울의 주인인 조선인은 5인밖에 아니 된다.
어찌 전화뿐이랴. 조선 내에 있는 철도 윤선 탄탄대로 우편 전신 이러한 모든 문명의 이기는 그것을 설비하는 비용과 노력은 조선인이 하고 그것을 이용하기는 일본인이 한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는 우리를 가난하게 하고 약하게 하고 천하게 하기에만 이용되었고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아직 이용되지 못하였다'.
광복과 함께 공간을 문명화할 통신 주권은 회복되었지만 19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전화는 여전히 귀한 물건이었다. 전화를 갖기 위해 권력에 기대는 청탁행위가 비일비재했던 그 시절에는 남에게 가입권을 팔 수 있는 '백색전화'와 사용권만 주어진 '청색전화'가 있었다.
유선전화가 2200만 회선을 웃돌고 휴대전화 가입자 수 4560만을 헤아리는 오늘 앞선 세대의 청백 두 가지 색깔 전화에 대한 회고담은 이 땅의 청춘들에게 마치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터이다.
사실 궁내부와 여타 행정부를 잇는 관용전화망은 1896년께 이미 개통돼 있었다. 그해 9월에는 관용선의 통화권이 인천의 감리서까지 연장됐는데 그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 김구 선생이다.
'백범일지'를 보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을 죽인 선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고종이 친히 인천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혹 그때 칙명을 연결한 교환수가 100회선짜리 자석식 교환기 앞에 상투 틀고 앉아 있는 바로 그 사람(사진)일지도 모를 일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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