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그때와 지금] '차관 도입 자립경제 이루자' 경제개발계획의 '원조' 어윤증

인간이 사물을 보는 인식의 폭과 깊이는 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과 견문한 세상의 크기에 비례한다.

어윤중(1848~1896)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미양요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던 1871년까지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것은 유교의 도그마였다. 그러나 그는 개항 이후 박규수를 만나 개화사상에 눈뜨고 특히 1881년 조사시찰단을 이끌고 일본의 근대 문물을 살펴보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다. 사진(독립기념관 소장)은 그때 일본에서 찍은 것이다.

시찰 후 그는 당시 국제 정세가 약육강식의 춘추전국 시대보다 더 생존 경쟁이 심하므로 나라를 살릴 길은 부국강병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일본은 이상적 개혁 모델이었다.

그때 그는 일본처럼 군주는 군림하되 정권은 근대적 개혁을 도모하는 정치세력이 잡는 집권적 정부 세우기를 꿈꾸었으며 정부 주도 아래 재벌을 기르고 외자를 들여와 산업을 일으킬 생각도 가슴에 품었다.

그러나 같은 꿈을 꾼 김옥균이 성급하게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 역시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그의 개혁 구상은 1894년 갑오개혁 때가 돼서야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800만원의 차관을 들여와 산업을 일으켜 3년 뒤엔 빚을 다 갚고 자립경제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심 찬 계획은 1896년 아관파천 후 보은으로 몸을 피하던 중 폭도에 의해 한창 일할 49세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으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외자도입을 통한 산업 일으키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실천한 국가건설 내지 경제개발 전략의 원형이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