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 노예선 아미스타드호 선상 반란···'무죄' 평결로 정의 지킨 미 법원
1839년 7월 2일 쿠바에서 32㎞ 떨어진 해상에서 노예로 팔려가던 53명의 아프리카인이 반란을 일으켜 아미스타드호를 장악했다. 그들은 백인 2명만 살려두고 선원들을 모두 살해했다. 목적은 오직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항해 기술이 없었기에 그들은 살려둔 백인 2명에게 키를 맡기고 아프리카로 가는 중이라고 믿었다.그러나 백인들의 속임수로 흑인들은 두 달 뒤 북쪽 코네티컷 해안에서 미 해군 함대에 붙잡혀 살인 혐의로 감방에 갇혔다. 이 사건은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아미스타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1839년 이른 봄 서아프리카 해안 시에라리온의 노예 수용소로 납치된 아프리카인들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 건너 쿠바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스페인 노예 상인 2명에게 팔려 6월 27일 아미스타드호에 실린 채 아바나 항구를 출발했고 5일 후 선상 반란을 일으켰다. 목숨을 건진 백인 2명은 노예 상인이었다.
그들은 낮에는 아프리카를 향해 동쪽으로 가는 척하다가 밤이 되면 방향을 바꿔 북아메리카 해안을 이탈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중 미 해군에 발견되어 8월 27일 미국 땅에 도착해 연방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1840년 1월 법원은 아프리카인이 자유인이므로 정부 감독 아래 아프리카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 기간 내내 감방에 갇혀 있던 아프리카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스페인 간의 조약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아프리카인들을 스페인의 재산으로 인정하고 반환해야만 했다. 아프리카인을 자유인으로 본 미국 법원과 상반된 시각이었다. 스페인 정부에 대한 의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연방 대법원에 항소를 제기했다. 행정부가 사법부를 압박한 셈이다.
이 재판에서 제6대 대통령을 지낸 존 퀸시 애덤스(1767~1848.사진)가 74세의 고령으로 아프리카인을 위해 변론을 맡았다. 1841년 3월 9일 대법원은 아프리카인들이 '자유인으로 태어났으므로' 자유인의 권리가 있고 따라서 노예 상인들의 재산이 될 수 없다고 평결했다.
아미스타드 사건은 심각한 국론 분열을 야기했고 남부와 북부의 의원들은 극단적으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20년 뒤 결국 남북전쟁이 터졌다. 그러나 미국은 큰 대가를 치르면서도 '정의와 도덕적 권리'를 끝까지 지켜냈고 미국이 치른 희생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 사법부가 '도덕적 신념'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등장은 어렵지 않았을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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