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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 플레이스] 마이클 '모타운' 잭슨

박용필/객원 논설위원

1960년대는 비틀스를 앞세운 '영국의 침공'으로 미국의 팝 뮤직이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다. 이 무렵 미국의 자존심을 되살려 낸 건 '모타운'(Motown)의 흑인 음악. '모토'(자동차)와 '타운'의 합성어로 디트로이트의 별명이다.

당시 모타운이 배출해 낸 스타들은 다이애나 로스와 수프림스(3인조 여성보컬 그룹) 스티비 원더 등 아무리 팝송에 문외한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대중음악의 '전설'들이다.

이들은 비틀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그친 것이 아니다. 런던에 상륙해 검은 돌풍을 일으키며 영국의 팝계를 점령하다시피 한 것. 비틀스의 공격에 역습으로 맞불을 놓았던 셈이다.

모타운의 성공신화. 알고 보면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과 무관치 않다. 창업자 베리 고디는 부품들이 생산라인에서 조립돼 새차가 나오는 것처럼 톱스타들을 만들어내는 게 꿈이었다.



고디는 디트로이트의 허름한 2층짜리 집을 사들여 '모타운 레코드'란 회사를 차렸다. 재능있는 청소년들이 이곳에서 '조립'돼 '캐딜락'으로 거듭 태어났다고 할까. 어찌 보면 모타운의 음악은 도시의 산업화가 이뤄낸 산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 동안 빌보드 차트(인기 순위) 톱 10에 오른 모타운의 히트송은 무려 110 여곡. 숫자로만 봐도 모타운의 위력이 어떠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70년대 들어서 모타운의 영광을 한껏 드높인 인물은 마이클 잭슨. 한마디로 모타운의 세계화를 이끈 미국의 아이콘이었다.

모타운의 성공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모타운이 흑인의 뿌리인 재즈와 블루스만 고집했다면 반짝하고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흑인의 음악을 백인의 팝에 접목시킨 게 성공의 계기가 된 것. 소울과 가스펠 송 R&B(리듬과 블루스)를 섞어 놓는가 하면 사이키델릭까지 영역을 넓혔다.

흑인의 목소리로 백인의 감성을 뒤흔들어 놓은 모타운. 흑ㆍ백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이른바 '모타운 사운드'라는 전혀 새로운 장르를 창출해 낸 것이다.

피부색깔에 관계없이 대중의 귀와 입 눈을 즐겁게 해 준 모타운. 어느새 '우리는 하나'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흑인들의 민권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타운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다. 그래서 모타운의 역사적 기여를 인종통합에서 찾는 사회학자들도 적지 않다.

모타운의 마케팅 전략은 '키스'(KISS). '바보야 단순하게 만들어'(Keep It Simple Stupid)를 모토로 내걸었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익숙한 멜로디와 리듬을 도입해 팬들과의 '입맞춤'에 성공한 것. 그러니 모타운은 히트곡의 산실이 될 수 밖에.

1980년대 초 모타운의 본고장 디트로이트는 일본차에 밀려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오일 쇼크로 인해 사람들은 소형차를 선호하는 데도 GM과 포드 크라이슬러는 중ㆍ대형차 생산만을 고집해 소비자들과의 '입맞춤'에 실패한 때문이다. 그래서 '빅 3'가 진작에 모타운의 'KISS' 전략을 본땄더라면 구제금융의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올해는 '모타운 레코드'가 설립된지 꼭 50주년을 맞는 해다. 영국의 '침공'을 막아내고 흑과 백의 인종화합에 기여한 모타운.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타계와 함께 모타운도 자동차 산업처럼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잭슨의 비극적인 죽음과 빅 3의 참담한 몰락…. 이제 역사의 한 챕터가 조용히 막을 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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