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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LACMA 한국미술전과 박이소

이일 / 화가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었다. "늘 영어 하는 것이 답답하고 싫어서 거 왜 알잖아요."

아무 감정이 없는 듯 자신의 이혼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후배 화가 강익중 부부의 소개로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1.5세와 결혼했다고 해서 저녁 초대받은 것이 엇그제 같은데 이혼을 했다니. '박이소' 하면 생각나는 것이 이처럼 시니컬하고 무덤덤한 이혼 사유에 대한 대답이다.

그의 본명은 박철호다. 그를 처음 본 것은 브루클린 북쪽 강가 그린포인트에 있는 허름하고 황량한 창고에서였다.

나는 갓 결혼한 후 룸메이트와 헤어지고 새 거처를 찾아 화가 최성호와 함께 그곳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훤칠한 키에 검은테 안경을 쓴 어슴프레한 모습이 마치 희미한 사진 속에서 익히 보아온 시인 이상을 연상케 했다.



건물 5층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그리고 박철호 다음은 최성호 순서로 창문 두 개씩 들어가게 계약을 하고 곧바로 벽을 세우는 등 수리를 했다. 창문 너머로 유엔본부가 지척에 보이는 물가 전망이 좋아 혹했는지 겨울에 대한 대비책은 어느 누구 안중에도 없었다.

겨울이 되니 거덜거리는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혹한은 만주벌판이 따로 없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창고에 난방장치가 있을 리 없었다. 그곳에서 모두들 잔뜩 껴입고 꾸역꾸역 그림을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에서 '철'자 발음이 미국인 혀에 부담이 된다고 어느날 '모'로 바꿔다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강익중과 함께 가마솥을 머리에 쓰고 두드리면서 브루클린 브리지를 횡단하는 '2인 해프닝'을 감행 심상치 않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훗날 둘은 각각 한국을 대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한다.

그 후 박모는 동네 빈 가게 터를 얻어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라는 화랑을 열였다. 현지 젊은 미국 작가들과 어울리면서 급진적이고 황당한 전시를 기획하며 심심찮은 날들을 보냈다.

때에 맞춰 한국에서 요란을 떨던 민중미술 멤버들의 아지트 역할도 곁들였다. 그들과 어울리면서도 그의 작업 성향은 자신만의 일정한 맛을 유지하고 있었다. 작품은 빈약하고 형편 없으면서 정치.사회참여의 선동적 구호만 요란한 그들과는 다른 일면이 있었다.

몇 년 후 약삭빠른 민중 리더들이 그들의 한계에 봉착해 슬그머니 변신을 시작하면서 제도권을 넘보던 시절 그도 운좋게 서울로 교수가 되어 떠나게 됐다.

1995년 서울에서 마지막 본 그의 모습은 밝았다. 피식피식 웃으면서 배어나오는 냉소주의적 표정도 어느 정도 걷힌 듯했고 뉴욕에서 보지 못했던 함박웃음도 터트렸다. 이름을 '박이소'로 바꾼 이야기도 했다.

28일부터 LA카운티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 12인전에 박이소의 작품이 소개됐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면서도 그의 유작들이 새삼스럽게 조명을 받는 것을 보니 작가로서의 복은 타고난 모양이다.

25년 전 그린포인트 창고에서 마치 정열의 화신인 양 어울리던 수많은 젊은 작가들은 이제 다 흩어졌다. 그 을씨년스럽던 창고건물 앞 쓰레기 하치장도 자그마한 개인 요트가 한 대 묶여 있을 정도로 산뜻한 물가공원으로 변신했다.

그가 추위에 웅크리고 있던 창가의 기막힌 강변 전망도 강 건너편 롱아일랜드시티의 변화로 반쯤은 막혀버렸다. 이놈의 도시는 가난한 화가들이 발을 붙일 만하면 요란한 개발 바람이 분다. 기다렸다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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