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과 넥스트 '그대에게' 온다···내달 4일 포드 앰피시어터
중앙일보·중앙방송 후원
넥스트는 80년대 후반 댄스와 발라드가 중심이었던 대중음악계에 록음악을 들고 당당하게 등장 한국식 록음악의 대중화를 이끈 '대표 록 밴드'다.
서강대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무한궤도로 출전해 '그대에게'로 대상을 수상하며 대중음악을 시작했고 1992~1997년 록그룹 넥스트로 활동 음악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아왔다는 평을 들어왔다.
넥스트의 진정한 매력은 그들의 음악이 언제나 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내왔던 세대의 정서를 대변했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신해철에게 '마왕' '교주' 등의 수식어를 붙였다.
긴 머리 독기 가득한 눈빛 선글래스로 비춰지는 그의 '반 사회' 이미지는 사춘기 시절 기성 세대를 향한 불만이 가득했던 젊은이들의 갈등을 해소해주던 청량제 같던 존재였다.
그 넥스트가 다음달 4일 오후 7시30분 할리우드의 포드 앰피시어터에서 '어웨이크닝 월드 투어(Awakening World Tour)'의 일환으로 최초 미국 콘서트를 연다.
아시애틱 엠파이어가 주최하고 중앙일보.중앙방송이 후원하는 이번 공연은 미국 최대 휴일인 독립 기념일에 열리는 비영리 콘서트다.
지난해 결성해 17주년을 맞은 '넥스트'는 4년 만에 내놓은 새 앨범 '666'을 기념해 '2008 넥스트 어웨이크닝 전국투어'를 벌였고 이어 미국공연까지 펼치게 됐다.
넥스트는 이번 로스앤젤레스 공연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의 소규모 공연장을 찾아 팬들과의 교류를 앞두고 있다.
3명의 국악인들이 참여해 가요와 국악을 퓨전한 음악을 선보이며 타민족들과 문화교류의 장을 여는 공연을 펼칠 각오고 밝혔다.
불경기와 스트레스에 찌든 삶을 살아가는 많은 한인들 특히 90년대를 신해철과 공감했던 이들에게 이번 공연은 분명 큰 활력소가 될 것이다.
이메일 인터뷰…"LA 공연은 내 음악인생의 전환점"
이번 LA공연을 그들의 음악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고 싶다는 신해철과 넥스트와 이메일을 통해 그 동안의 공연준비와 앞으로의 계획 등을 알아봤다. 다음은 신해철과의 일문일답.
-이번 LA공연의 목적은 무엇인가.
“관객이 누구이던, 우리는 우리 스스로와 관객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다. 그뿐이다. 단, LA에서는 넥스트가 팀의 역사상 처음으로 무대에 올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매우 짜릿하다.
나는 뉴욕과 뉴저지 등에서 2년간 거주한 적이 있지만 서부에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다양한 연령층의 한인들과 미국인들을 만날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7년 동안이나 넥스트라는 밴드에 활동했다. 소감이 어떤가.
“야구를 하는 소년들은 자신이 스타 플레이어가 되기를 꿈꾸지만 동시에 ‘양키스’나 ‘다저스’처럼 위대한 구단의 일원이 되기를 꿈꾼다.
나 역시 소년 시절부터 위대한 밴드의 일원(포지션에 상관 없이)이 되기를 희망했고 솔로로서 유명 ‘연예인’이 되기를 바란 적이 없다. 그리고 내 꿈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넥스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가.
“넥스트를 통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넥스트가 나의 삶과 거의 합쳐져 버렸기 때문이다. 세계시장 진출이라든지 얼마든지 야심은 있겠지만, 그저 ‘산이 거기 있기에 올라간다’ 라는 기분이 더 정확 할 것 같다.”
-지난 88년 가요계 데뷔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나.
“그렇다.모든 것이 바뀌었다. 전문음악인 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20세의 나이에 음악계에 뛰어들었고 많은 시련이 있었다. 나의 커리어에는 무명시절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음악적 슬럼프도 거의 없었다. 대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지금은 팬들과 가족, 그리고 의사의 도움으로 버티고 있다.”
-한국 가요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하나.
“데뷔 후 약 10년간 나는 서양음악에 비해 낙후된 가요계에 얼리 어답터로서의 역할(아직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장르들을 시험하고 한국화 시키는)을 수행했다.
나는 유명한 틴 아이돌 발라드 가수였지만 동시에 한국에 최초의 랩 히트곡을 선보였고 24비트 댄스 뮤직, 유로 신스 팝을 소개 했고 또한 최초로 메이저 시장에서 성공한 하드록 밴드를 이끌었다.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를 이룬 후에는 밴드를 해산하고 영국에서 레코딩 엔지니어링을 공부하여 스스로 엔지니어가 되었으며, 재결성 후에는 가요의 유니크 함과 오리지널리티를 연구하는 입장에 서있다.”
황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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