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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학문으로 신념 표출한 막스 베버, 우리 대학가 '폴리페서'에 경종

자본주의 발전에서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 사회학자로 널리 알려진 막스 베버(1864~1920.사진)는 독일의 국가주의.권위주의.관료주의에 맞서 싸운 비판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독일제국의 역사(1871~1918)와 거의 일치한다. 독일은 1871년에 이르러서야 서유럽 국가들 중 마지막으로 통일을 이룬 '지각한 국가'였고 통일의 중심에는 토지귀족 출신의 비스마르크가 있었다.

베버와 그가 속한 시민계층은 정치적으로 비스마르크의 '아들'이었다(김덕영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그들은 비스마르크가 구축한 독일제국에서 태어났고 그 기반 위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시민계층은 자신을 '아버지'인 귀족계급과 동일시했다.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을 지닌 독자적 사회집단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봉건화.귀족화되어 가고 있었다.

베버는 비스마르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물론 독일 통일의 업적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서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독일에서는 시민계층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족세력이 통일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베버는 인정했다.

국가의 통일은 아버지의 업적이므로 아들은 이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의미는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만약 무대에 계속 남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지금까지의 공로도 퇴색하고 말 것이었다. 이제 아들이 역사의 무대에 설 차례였고 그 아들은 다름 아닌 시민계층이었다.

서울대가 '폴리페서'들을 규제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오히려 양성화하는 내부 규정을 마련했다가 반대 여론에 밀려 보류했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권력'을 택하건 '학문'을 택하건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학생 수업권과 대학 운영에 지장을 주는 인사들이 과연 개인적 영달을 넘어서서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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