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 첫 유학생 유길준의 '서유견문'
한 세기 전 최초의 유학생 유길준(사진)이 유학길에 오를 때만 해도 금의환향의 지름길은 여전히 과거 급제였다.1881년과 1883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과 미국 유학은 예기치 못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두 번 다 1년 반도 못 돼 끝나 버렸다. 그러나 1884년 미국 유학 중 찍은 하이칼라 머리를 한 유길준의 사진은 전통적 출세의 길을 차버리고 신문명을 따라 배우려한 그의 결심을 손에 잡히게 보여준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그가 큰 뜻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나래를 접게 만들었다. 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한 원세개는 이 땅의 사람들이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품지 못하게 억눌렀다.
청운의 뜻을 품고 떠난 일본 유학생들이 줄소환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참극이 빚어졌다. 영어와 국제법에 밝은 인재에 목말랐던 고종은 그에게 귀국을 명했다.
그러나 1885년 말 제물포로 돌아온 그를 맞은 것은 활짝 열린 등용문이 아니었다. 박해의 손길을 피해 그의 식견을 활용하려 한 고종과 측근들이 짜낸 고식책은 연금이었다.
7년 남짓 궁중의 자문에 응하며 권력의 비호 아래 간신히 목숨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앞서 보고 깨달은 자의 의무를 다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1894년 4월 1일 일본에서 출판된 '서유견문'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 책은 당대 한국인들의 세계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서양 문물 소개서이자 근대화의 필요성과 방법을 역설한 개화 사상서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바깥세상을 보는 동포들의 눈이 뜨이고 귀가 터지길 바란 그의 소망은 1896년 아관파천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일본으로 몸을 숨겼으며 나온 지 채 2년도 못 돼 망명객의 책은 금서가 되고 말았다.
20만 부 이상 팔린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은 일본인들을 근대 국민으로 바꾸는 데 이바지했지만 자비로 1000부를 찍은 '서유견문'은 당대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유학을 통해 얻은 지식을 동포들의 안목을 넓히는 데 쓰일 수 있도록 부단히 되돌리려 했다. '세계대세론'(1883) '중립론'(1885) '노동야학독본'(1908) 그리고 '대한문전'(1909) 등 그가 남긴 논저들은 일관된 그의 삶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성취를 동포와 함께 나누려한 선각자였다. 지구촌 이곳저곳에 우리 유학생들이 차고 넘치는 유학 전성시대를 사는 오늘도 그가 보여준 되돌림의 정신은 여전히 따라 배워야 할 사표로 작동한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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